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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nautes 프리나우트 Sep 19. 2023

사실, 혼바(本場)의 맛은 저도 몰라요.

일본식 김치찌개(キムチ鍋)

혼바(本場)란,

어떤 것이 주로 행해지는 곳(나라, 장소) 혹은 어떤 것의 본래의 산지


먹을 것으로 말하자면 요리가 주로 만들어지는 곳 혹은 요리의 원조 격인 고향 같은 것을 뜻한다. 김치로 말하면 한국이 떠오르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우리 집은 일 년에 적어도 두 번 가족들이 모두 모인다. 엄밀히 말하면 '나'의 가족은 아니고 '남편'의 가족이지만. 모임의 장소가 우리 집인 이유는 내가 사는 곳이 소위 말하는 '시댁', '시월드'로 대표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는 시집에 들어와 사는 큰 며느리이다.


우리는 첫째가 아직 누워서 젖만 빨던 시절부터 함께 살았다. 벌써 강산이 바뀔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다 모이면, 먹을 수 있는 입만 세는데 양 손가락을 다 써도 모자랄 만큼 많다. 당연히 요리 한두 가지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시엄마는 물론 나도 한두 가지는 만들어야 구색이 맞는다. 처음에는 집에 손님을 초대하는 입장이니 뭐라도 도와야겠다는 마음으로 요리를 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 요리를 먹는 가족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음식을 입으로 날랐을 때 '맛있다'라고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말. 자꾸만 젓가락을 가져가는 모습. 맛있다며 다른 사람에게 권하는 모습. 이런 것들을 보면서 뿌듯해졌다. 


이제는 맛있게 내 요리를 먹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맛있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에서 음식을 만든다. 기대감에 부풀어서. 메뉴도 흔해빠진 요리에서 우리 집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 예를 들면 한국요리와의 퓨전이라든지. 파티요리처럼 자주 먹을 수 없는 것들로 진화(?) 하고 있다.


어느 가족모임의 날. 보름쯤 전부터 시엄마와 메뉴를 고민했다. 일본식의 간장 맛이 진하게 베어 달고 짠 음식 들은 질렸다. 그 맛이 그 맛인 것 같았다. 오랜만에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해보기로 했다. 김치찌개. 칼칼한 고향의 맛을 느끼고 싶었다. 두툼한 멸치로 진하게 육수를 내고, 사방에 연지곤지를 찍은 불그레한 김치를 쓱쓱 썰고, 팔팔 끓이다가 마늘을 썰어 넣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만드는 방법이 간단하니 좋고, 맛있을 테니 좋고.


내 이야기를 들은 시엄마는 김치를 좋아하신다며 맛있겠다고 하셨다. '혼바(本場)'의 김치찌개 맛이 기대된다는 말도 함께 덧붙이셨다. 정작 나는 한국의 김치찌개 맛이 어떤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일본에 온 지 3개월이 갓 넘었을 무렵. 서류 준비 등의 일을 위해 한국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낯선 일본땅에 발을 디디던 3개월 전의 나는 모든 게 '처음'이었다. 비행기도, 해외도, 언어도, 외국에서 산다는 것도. 필요한 것이 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작은 캐리어에는 옷 몇 가지와 칫솔 같은 걸 넣었다. 마치 짧은 해외여행이라도 가는 것처럼. 메는 가방에는 컴퓨터와 책. 그러고도 들어갈 데가 없어 손 한가득 책과 서류를 들고 들어왔다.

누가 보면 열정적인 공부 마니아 같지 않았을까. 


잠시 살아보니 필요한 것이 너무나 많았다. 아직 한국식이 익숙했던 때라 젓가락조차 나무가 아닌 스테인리스가 좋았다. 잠깐 들어갔다 나오면서 나는 내 몸도 들어갈 만큼 커다란 사이즈의 캐리어를 준비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한국의 물건을 고집했다. 냄비, 수세미, 라면을 처음으로 박스로 사기도 했다. 겨울에 친정엄마와 함께 담갔던 김장김치도 욕심부려 잔뜩 넣었다. 커다란 가방을 샀는데도 뚜껑을 닫을 때는 가방 위에 올라타고 야단법석을 떨어야 했다.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탈 때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아빠의 차 트렁크에 함께 큰 가방을 넣으면 되었으니까. 


당시 나는 유명한 관광지에 살고 있었다. 언덕이 많은 지대가 높은 곳. 길은 대체로 좁고 울퉁불퉁했다. 계단도 많았다. 


비행기에서 내려 짐을 찾으며 깨달았다. 


'나 집까지 혼자 갈 수 있을까?'


빙글빙글 도는 수하물 찾는 곳. 무겁고 큰 가방을 한 번에 들어 올리지 못해 혼자 낑낑댔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겨우 내리고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게다가 바퀴가 고장 난 건지 잘 움직이지 않았다. 짐을 싸면서 욕심을 너무 냈나. 


리무진 버스에 몸을 싣고 어떻게 집에 가야 할지 고민했다. 


'택시를 타볼까.'


비싸기도 비싸고, 말도 안 통할 것 같아 두려운 택시를 타기로 했다. 편하게 가고 싶은 마음 하나만으로. 전철을 타고 집 근처 역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찾느라 오래도록 작은 역을 헤맸다. 지금만 참으면 편하게 갈 거라고 주문을 외우며 가방 든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


겨우 역을 빠져나와 택시 타는 곳에 도착했다. 결전의 순간. 저 멀리서 언덕을 내려오는 택시를 향해 용감하게 팔을 들어 올렸다. 짐을 싣고 자리에 앉는 것까지는 좋았다. 어디까지 가냐는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집 근처에 뭐가 있는지, 길은 어디로 뚫려 있는지 알지 못하던 때였다. 스마트폰이나 구글맵이 있었다면 조금 달랐을까. 나는 짧은 일본어로 기억하고 있는 집 주변에 대해 설명했다. 낮은 주택이 늘어진 좁은 골목. 주소도 제대로 외우지 못해 이것저것 말하다 보니 결국 역의 반대편에 내리고 말았다.


'이게 아니었는데...'


부족한 언어 실력을 탓하며 늦은 밤 인적 드문 길을 이를 악물고 걸었다. 덜컹대는 소리가 나를 놀리듯 온 동네에 울려 퍼졌다. 집 앞 계단은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올랐다. 문을 닫고 들어서는데 왜 그렇게 서럽던지. 주저앉아 엉엉 소리 내며 울었다. 


실컷 울다가 진정되니 제일 먼저 배가 고팠다. 가방 속 김치가 떠오름과 동시에 입 안에 군침이 돌았다. 그땐 그랬다. 그렇게 좋아했건만, 이제는 맛도 잊어버렸다. 


요리를 할 때 김치찌개의 칼칼한 맛을 살리고 어쩌고 말하는 내 혓바닥에는 이미 맛 따위 남아있지 않았다. 이럴 땐 되는대로 해야지 뭐. 슈퍼에서 고심하며 사 온 김치는 내 입에 달았다. 뚜껑에 매운맛 어쩌고 자랑처럼 커다랗게 써 놓고 어디가 맵다는 건지. 혓바닥이 얼얼한 매운맛에 익숙하지 않은 시댁 식구들을 위한 요리니까 청양고추 같은 것은 생략. 


매운맛을 부드럽게 해 줄 것을 찾다가 된장이 떠올랐다. 카라미소라면(辛味噌ラーメン) 도 있으니 의외로 익숙한 맛일지 몰랐다. 김치찌개에 된장을 살짝 넣어보았다. 두부도 이쁘게 잘라 나란히 넣고. 집에서 받아 냉동실에 넣고 조금씩 아껴먹던 고춧가루도 뿌렸다. 아무리 맛을 보아도 2% 부족한 맛이었지만 뭘 더 넣어야 할지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한국의 공기였겠지. 





내 입에는 달고 짜기만 한 김치찌개를 한 냄비나 만들어 손님상에 냈다. 모두들 바쁘게 냄비에서 김치찌개를 퍼 담았다. 오가는 손놀림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았다. ‘혼바의 맛 끝내주는데’라면서 매운지 스, 스 하는 소리를 내 가면서 먹는데 웃음이 절로 나왔다. 뭐가 혼바의 맛이라는 건가 싶고 맵다면서 잘도 먹는 게 신기하고.


나도 잊어버린 혼바의 맛을 당신들이 어떻게 알고 맛있다고 하는지. 하지만 된장 넣은 김치찌개. 너를 혼바의 맛으로 인정한다. 땅, 땅,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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