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숨 고르기

by 영백

며칠 동안 우리를 짓눌렀던 명절 물량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컨베이어 벨트는 한결 느리게 돌아갔고,

상자들은 여유 있게 흘러왔다.
팔과 허리는 여전히 묵직했지만,

숨 쉴 틈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몸이 가벼워졌다.

기팀장이 상자를 옮기다 고개를 들었다.


“쌤, 오늘은 꿈만 같네요.”
나는 짧게 웃었다.
“꿈이 이렇게 땀나면 좀 그렇지만요.”

성이가 옆에서 테이프를 자르며 장난을 건다.

“형, 이제 이 속도면 차 마실 시간도 있겠는데요?”

문이가 곁에서 툭 치며 맞받는다.
“야, 그러다 또 물량 폭탄 맞는다.”
수형님은 말없이 박스를 옮기다 우리 쪽을 힐끗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에는 ‘이 정도면 살만하다’는 안도의 기운이 묻어 있었다.


작업장 공기는 여전히 비닐과 먼지 냄새가 섞여 있었지만,
며칠 전 그 숨 막히는 열기와는 달랐다.
손끝에 닿는 상자 표면이 오늘따라 차갑게 느껴졌다.
작업 동선도 여유로워져서, 잠깐씩 장갑을 벗어 손목을 풀 수 있었다.


“쌤, 오늘 끝나면 뭐 하실 거예요?” 성이가 물었다.
“오늘은 그냥 푹 잘 거 같네.”
“에이~ 이럴 때 고기 먹어줘야죠.” 문이가 거들었다.
기팀장이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너희는 고기 생각밖에 없냐.”

마지막 상자가 벨트를 지나갈 때,
기팀장이 장갑을 벗으며 어깨를 돌렸다.
“이제 좀 인간답게 살겠네요.”
나는 대답 대신 헬멧을 벗어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나오니 새벽 공기가 한층 부드러웠다.
몇 날 며칠 숨을 몰아쉬던 가슴이, 오늘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실 수 있었다.
하늘은 아직 새벽빛이었지만,
그 안에 희미하게 아침의 기운이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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