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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술책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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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술 Nov 30. 2021

위스키로 의리 게임을 한다면?

부자이고 싶은 네 명의 술꾼 직장인의 위스키 의리 게임

위스키, 하면 머릿속에 꼭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인공이 근심에 가득한 채, 화려한 조명이 비춰주는 고급스럽고 멋진 바에 들어가 의자에 앉으며 바텐더에게 말한다.


늘 먹던 걸로.


"늘 먹던 걸로."라는 5음절로 이루어진 이 말은 시청자들에게 많은 것을 보여준다.


첫 번째로, 주인공은 고급스럽고 비싼 바의 단골손님이다. 즉, 엄청난 부자다!


두 번째로, 주인공은 수천 가지의 고급 위스키 가운데 자신의 취향이 있다. 즉, 엄청난 부자다!


마지막으로, 주인공은 바텐더에게 '주세요'라는 말을 생략하고 아주 거만한 짧은 말로 주문할 정도로 경제적 지위가 높다. 즉, 엄청난 부자다.


위 내용은 단편적인 예시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위스키'라는 술은 '비싼 술', '고급술', '사회적/경제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마시는 술', '성공한 사람의 술'과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도 대다수의 위스키는 병당 최소 10만 원 정도로 대표적인 K-위스키인 소주가 병당 1500원인 점을 감안하면 가격이 매우 높은 것도 사실이다.


1번 사진: 피트향이 강한 탈리스커, 제주도 중문 면세점에서만 구할 수 있는 싱글몰트 위스키 듀어스, 2번, 3번 사진: 싱글몰트의 대명사 맥캘란과  글렌리벳.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하였던가


어린 시절, 나와 나의 친오빠는 식탁에 앉아 아버지의 술잔에 보리차를 따르며 '부자와 바텐더 놀이'를 하곤 했었다. 그러던 남매는 어느덧 성인이 되어 돈을 벌게 되었고, 아주 가끔은 위스키를 마시며 마치 부자가 된 듯한 희열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오빠는 서울, 그중에서도 가장 힙하고 취(醉)하는 동네인 '을지로'로 회사를 다니면서 퇴근 후에는 온갖 맛집, 술집의 향연을 즐기는 '서울 술꾼'이 되었다. 서울 술꾼은 별이 무려 다섯 개가 붙은 5성급 호텔인 조선 호텔의 라운지 바에도 종종 들러서 어렸을 때 보던 드라마 주인공의 대사를 할 수 있는 어엿한 남자가 되었고, 나는 서울 술꾼 오빠 덕 좀 보기 위해 서울 스타일로 한껏 차려입고 서울특별시로 출타했다.


서울 소공동에 위치한 웨스틴 조선 서울 호텔. 라운지 바에 들어가면서 찍은 사진인데 사진에서부터 술 취한 느낌이 느껴진다.


위스키로 의리 게임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오빠의 회사 동기들을 포함한 총 4명의 술꾼은 '위스키 플라이트 whiskey flight'라는 메뉴를 주문했다. 굳이 직역하자면 '위스키 비행'이라는 뜻인데 서너 가지의 특색 있는 위스키를 한 잔씩 제공하는 '위스키 맛보기 세트'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웨스틴 조선 호텔의 라운지 바에서 제공하는 '위스키 플라이트'. 각 위스키 별로 간단한 묘사와 향이 설명되어 있어서 여러 가지 위스키를 비교 음미하기에 좋다.

서로 다른 특징과 연산을 가진 위스키 4종이 우아한 글렌캐런 잔에 서빙되어 나왔다. 우리 네 명은 '진짜 부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 4종을 나누어 모두가 조금씩 맛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앞에서 마시는 사람이 욕심을 내서 조금이라도 많이 맛을 보게 되면 뒤에 남은 사람은 맛을 보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생기는 이른바 '의리 게임'이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아는 의리 게임은, 대학교 때 술자리에서 동기들의 '의리'를 확인하기 위해서 하는 게임이었다. 보통 소주 한 병을 가지고 동기들이 나누어 마시는 형식이었다. 소주는 누구라도 맛보고 싶어 하는 고급술은 아니었기 때문에, 소주 의리 게임에서는 앞사람이 많이 마셔주면 마셔줄수록 뒤에 남은 사람이 덕을 보게 된다.


주종이 소주에서 위스키로 바뀐다면?


상황은 완전 반대가 된다. 첫 번째 주자가 위스키 잔에 입을 대는 순간, 나머지 주자들은 그가 실수로 술을 많이 삼키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쳐다보고, 먼저 마시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아주 적은 양이 담겨있는 잔을 넘기는 손목 스냅과 목을 젖히는 스킬에 최대한 집중을 해야 한다.


다행히도, 그날 직장인 술꾼 네 명은 서로의 의리를 지키는 데 성공했고, 모두가 4종의 위스키를 맛보는 데도 성공했다!


부자도 아니고, 언젠가 그런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도 없어서 드는 생각일지는 몰라도, 그날 우리는 돈이 많지 않아서 훨씬 더 맛있는 위스키를 맛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단 한 번의 기회로, 아주 적은 양의 위스키를 맛보고 위스키의 모든 맛을 음미해야 했기 때문에 그 한 번의 기회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기 때문이다.


한 모금 정도 양의 위스키를 네 명이서 나누어 마시며 우리는 그 누구도 비참하거나 불쌍하지 않았다. 으리으리한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우리는 모두 '부자'였고, 그 속에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사치만 즐기며 모두 행복해하던 평범한 서울날이었다.


부자처럼 매번 서울에서 즐길 수 없으니, 집에서 비슷한 느낌을 내 본 '위스키 플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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