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무엇인가를 아예 몰랐으면 몰랐지,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가는 건 절대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나름 재수가 끝나는 시점까지 공부 방해된다고 스마트폰도 없이 학원에서 살던 고삐리가, 현실 세계에서 스마트폰 들고 지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매 순간 전과는 아예 다른 차원의 쾌락에 노출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늘어난 스프링이 탄력을 잃듯 매일 10시간 넘게 앉아만 있던 규칙적인 삶의 양식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세상에 놀건 왜 이렇게도 많고 새로운 거 신기한 건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이야. 이 기간은 정말 알코올 한 방울 안 마시고도 정신 빼놓고 놀 수 있었다.
그렇게 정신 못 차리고 흐물텅대던 기간이었다.
어느 날아빠가 나를 부르시더니 컴퓨터 앞에서 딱 이렇게 물으셨다.
너 여기서 수학 한 등급만 올리면 어디 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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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어디'란 당연히 대학이다.
아빠가 컴퓨터 화면에 켜놓으신 건 다름 아닌 정시 지원용 유료 배치표 진단 서비스였다.
재수 시절, 그리고 두 번째 수능이 끝나던 날부터 그 해 겨울까지 쭈욱, 아빠는 내게 입을 댄 적이 거의 없었다. 이미 지나간 일에, 혹은 이미 진행 중인 일에 가타부타 말 얹는걸 원체 싫어하셨다. 아님 그냥 내가 들어먹을 것 같지 않았거나. 두 번째 입시가 진행되던 중에도 내게 아쉬운 마음에 볼멘소리 하는 건 항상 엄마였지 아빠는 아니었다. 그런 아빠가 조용히, 그리고 처음으로 여쭤보신 질문이바로 저것이었다.
이미 입력되어 있던 내 성적에 수학만 몇 점 정도 보태서 새로운 결과를 산출해 드렸다. 아빠는 한참 동안 말이 없으셨다. 흐물텅대던 나도 덩달아 조용해졌다.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문과에서 수학 한두점의 위력이란 실로 대단한 것이구나. 기존 성적에서는 우주상향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윗 대학들이 수학 두 점만 올리면 전혀 지원할 필요도 없는 하향지원으로 떴다. 마치 어제오늘이 아예 다른 주식 그래프처럼 처음 보는 내용의 화면을 볼 수 있었다.(이게 문과의 현실이다.)
+) 물론 내가 그만큼 수학을 못 했다는 말로도, 수학 점수의 변별력이 어마어마하다는 말로도 양방향 해석 가능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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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아 너 수학 한 번만 더 해볼래?
아빠가 아까워서 그래.
수학과외 시켜줄게.
네가 피하지 않고 한 번만 더 최선을 다해 본다면 아빠 더 이상 너한테 뭐가 됐든 강요하지 않을 거다. 약속해. 할 수만 있다면 인생에 있어서 낭비인 선택은 아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