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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라쌤 Sep 14. 2021

2. 불안하고 외로울 땐 먹방?

살면서 친구들이 내게 지어준 여러 가지 별명들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뼈다귀이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날씬한 편이지만, 어렸을 적엔 뼈가 앙상하리만큼 왜소하고 빼빼 말랐었다. 하지만 그 별명은 호주를 다녀오고 더 이상 듣지 못했다. 워킹 홀리데이로 호주에 간 첫 8개월 동안 놀라울 정도로 많이 먹었다. 평생 살이 찐 적 없이 뼈다귀였던 내가 45kg에서 52kg으로 갑자기 살이 7킬로나 늘었다.  

   

스물네 살, 뭐 하나 딱히 잘하는 것도 꿈도 없었던 나는 영어라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그 당시 유행하던 어학연수 프로그램을 갔었다. 비교적 물가가 저렴한 필리핀에서 그룹과 일대일 수업으로 영어의 기본을 익히고 호주로 가서 일을 하며 영어를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필리핀 세부에서 4개월을 보내고, 호주로 넘어갔다. 나는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마음에 일부러 한국인을 만나기 힘든 소도시로 정했다. 대부분 시드니나 멜버른이라는 대도시로 가서 공부와 여행을 함께 즐겼지만, 나는 첫 도시를 시골 느낌이 나는 북호주의 소도시인 케언즈로 선택했다.   

   

거주지로는 두 가지 선택권이 있었다. 호주 가족과 지내며 자연스레 영어를 배울 수 있는 홈스테이와 한국인 유학생이 운영하는 셰어 하우스였다. 당연히 홈스테이로 가려고 했지만 케언즈는 도시 특성상 홈스테이의 위치가 매우 멀었다. 내가 다니는 어학원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이나 걸렸다. 나는 비교적으로 도심지와 가까운 곳으로 정하다 보니 한국인이 하는 셰어하우스에서 지내게 되었다. 셰어하우스는 나와 비슷한 목적으로 온 한국인들이 여러 명 모여 사는 곳으로 대부분 한 집에 여섯 명 이상 모여 산다. 많은 곳은 열 명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첫 마음과 달리 어학원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한국인들과 자주 어울리게 되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영어를 늘리려고 무작정 태국 음식점에서 일했다.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내가 처음으로 맞닥뜨린 난관은 페퍼 좀 달라는 손님의 주문이었다. 영국식의 악센트가 강한 발음이 익숙하지 않았던 때라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난 웃으면서 알았다고 하며 뒤를 돌았다. 머리를 마구 굴렸다. ‘페퍼가 뭘까.. 내가 아는 단어 중에는 페이퍼랑 가장 가까운데? 그럼 종이와 가장 비슷한 게 뭐가 있지?’

순간 내 눈에 냅킨이 보였고, 하얗고 네모난 것이 딱 작은 페이퍼 같았다. 유레카! 이거구나 싶어 당당하게 웃으며 손님에게 냅킨을 가져다주었다.     


손님은 황당하다는 듯 이게 뭐냐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게 아니라는 걸 알고 쭈뼛쭈뼛 눈알을 굴리며 서있으니 손님이 직접 일어났다. 나보다 두 배나 더 큰 덩치로 저벅저벅 주방으로 걸어가서 주방장에게 후추를 받아왔다.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 기본적인 걸 모르다니.. 소금과 후추는 외국 식당에 가면 기본적으로 있는 것들인데 센스가 없던 나의 얼굴이 새빨개진 기억이 있다.     


어느 날은 어학원에서 현지인 선생님들이 ‘디스거스팅’이라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대화를 엿들었다. 재미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브라질에서 온 친구에게 “너 참 디스커스팅 하다”라고 말했다. 디스거스팅의 의미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사람에게 쓰면 밥맛없다 혹은 재수 없다 라는 뜻이 된다. 기분 나빠하는 브라질 친구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지만 친구는 이미 상처를 받았다. 영어를 잘해 보이고 싶어서 따라 했다가 괜히 친구 한 명을 잃고 말았다.      


영어가 늘지 않아 답답했다. 무식하게 들이대는 용기로 열심히 살았지만 뭔가 공허했다. 그 시절, 어린 나이에 해외를 나가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도 없는 타국에 혼자 가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했다. 난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돈으로 어학원을 등록해 야심 차게 호주에 왔지만 조금씩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무얼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함, 호주에서 허무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은 답답함, 마음 나눌 친구들이 없는 외로움이 몰려왔다.


그때, 공허한 나의 마음을 채워준 것은 음식이었다. 아무리 먹어도 살찌지 않는 나의 체질을 무기 삼아 먹는 걸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주로 된장찌개와 계란찜, 각종 밑반찬으로 5첩 반상을 만들어 먹었다. 고기가 저렴한 호주에서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맘껏 구워 먹고 불고기와 제육볶음 등 한국요리를 만들어 먹었다. 간식으로는 떡볶이와 라면, 쫄면, 스파게티를 해 먹었다. 하루에 다섯 끼는 기본으로 먹었던 것 같다. 여러 사람들이 모인 셰어 하우스에서 내가 음식을 하면 구경하는 사람들과 같이 나누어먹는 재미도 있었다. 특히 호주에 온 지 얼마 안 된 향수병이 생긴 사람들에게 음식을 해주면 엄마가 해 준 맛 같다고 칭찬도 들었다. 그들의 힘든 타향살이로부터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채워주는 것 같아 뿌듯했다.     


내가 많이 먹었던 이유는 사람들의 반응이 가장 컸다. 누가 봐도 말랐던 내가 음식을 많이 먹으니, 먹을 때마다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봤다. 마치 서커스에서 묘기를 부리는 사람을 보듯 입을 떡 벌리고 나를 쳐다봤다. 사람들의 놀라운 표정을 볼 때면 이건 마치 나만이 할 수 있는 장기 같았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관심이 좋았다. 사람들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배가 불러도 과식하는 습관이 생겼다. 목구멍까지 음식이 차올라야 배가 부르다고 인지했다. 난 그때, 사람들이 보여주는 관심이 내가 사랑받는 것이라고 착각했다. 먹을 때 내 위가 채워지면 내 안에 있는 공허함과 답답함도 채워지는 듯했다.      


아마도 나는 첫 해외 생활이 몹시 불안했던 것 같다. 사실 호주를 가게 된 계기는 내가 아빠에게서 도망친 시기와 비슷하다. 이복동생이 7살 되던 해에 아빠는 또다시 이혼을 하셨다. 불안정한 환경에 있는 동생을 나에게 봐달라고 부탁했었다. 한 달에 백만 원을 줄 테니 알바를 그만두고 보모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모성애와 동정심에 잠시 흔들렸지만 24살에 아이를 돌보는 보모라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난 아빠의 부탁을 거절하면서 핑계 댈 것이 필요했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해외 생활이었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갔다기보다는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던 마음이 컸다. 그래서였는지 모르겠다. 나의 불안함을 감추기 위해 더 많이 먹었다. 하지만 아무리 먹어도 허한 마음은 도무지 나아지질 않았다.      


호주에 간 첫 8개월을 생각하면 불안함 속에서 아무것도 못했던 시간들이었다. 의미 없이 지나가는 일상이었다. 그냥 날이 밝으니까 아침인 것이고 어두워지니까 밤인 것이다. 원초적인 동물처럼 살았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배부르면 누워있었다. 돈이 없으면 알바를 나갔다. 쉬는 날엔 어디서부터 온 건지 모르는 답답함과 불안함에 마구 휩싸여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울었다. 한창 무언가에 대한 도전과 성취감이 있을 시기에 가슴을 뛰게 만드는 목표가 없었다. 아무 계획 없이 시간만 흘려보내며 우울한 나를 잡아줄 그 누군가도 없었다. 이곳이 외롭다고 울면서도 한국으로 돌아가면 까마득한 미래만 있을 것 같아 더 두려워졌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삶이 불안할 때 살이 찐다고 한다. 먹을 때 행복감을 느끼고 그 행복감에 도취되어 음식에 중독되기 때문이다. 먹는 것이야 말로 가장 빠르게 나에게 평안을 안겨준다. 그리고 지금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잊게 해 준다. 잠시 잊게 해주는 것으로 먹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처럼 남들의 시선과 관심을 사랑이라 착각하고, 보여주기 위해 많이 먹는 것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까. 평생 살이 찌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던 나에게 7킬로가 확 찌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혹시 과거의 나처럼 폭식과 과식으로 인해 체중이 급작스럽게 불어난다면, 현재 내 상황이 불안하지 않은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불안하게 만들까. 음식에 대한 집착으로 내가 무언가로부터 도망가려는 건 아닐까. 과거에 대한 아쉬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혹은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지 생각해보자. 나는 이유도 모른 채 오래도록 불안한 마음과 상황에 이끌려 살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래도 그때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30대가 넘어가니 나도 조금만 방심하면 옆구리와 허벅지에 지방이 쉽게 불어난다. 불안함을 음식으로 채웠던 그때는 신진대사가 활발한 20대의 나이었으니 참 다행이다.       


과거의 나는 살찌는 원인을 알아내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급격히 체중이 불어난 시기 덕분에 현재를 건강하게 사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과거의 불안정한 삶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몸과 마음을 돌봐주는 것이었다. 마음이 불안한 원인이 아빠로부터의 도망 그리고 남들로부터 관심받고 싶은 욕심이라는 것을 알고 인정해주었다.      

그동안 좋지 않은 음식에 길들여진 입맛을 바꾸기 위해 탄수화물을 줄여보고 저염 식단도 해보았다. 다양한 건강 식단을 경험해보면서 내 몸에 맞는 식사법을 찾아갔다. 여러 방법들을 통해 깨우친 것은 하나였다. 내 몸과 마음의 주인은 나라는 사실이다. 무작정 먹고 싶은 것을 먹기보다는 내 몸과 마음이 왜 공허하고 불안한지 봐준다면 틀림없이 편안해지는 길이 보일 것이다.     


요즘 유튜브에서 먹방이 굉장히 대세이다. 아직도 과거의 나를 기억하는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먹방을 해보지 않겠냐고 말한다. 난 여전히 무엇이든 맛있게 그리고 잘 먹는다. 이제 나는 과거의 내가 왜 그렇게 먹을 것에 집착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먹방 해보라는 말을 들을 때면 왠지 씁쓸해진다. 내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의 만족과 관심을 위해 먹는 행위를 한다면 예전의 내가 생각나서 슬퍼질 것 같다.     

 


미라쌤의 치유법 :0


내 마음이 공허하고 불안하다면 무언가를 먹는 것보다 내 마음을 토닥여주는 건 어떨까.

힘든 마음의 원인과 이유를 알면 조금씩 좋아질 것이다. 당신이 원치 않는 살이 아닌 원하는 삶을 얻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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