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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라쌤 Sep 13. 2021

1. 나는 왜 눈치를 볼까

20살, 곰장어 가게에서 서빙 알바를 했었다. 가게는 아담했지만 숯불에 굽는 곰장어 맛이 기가 막혀 저녁에는 늘 북새통을 이루는 식당이었다. 어느 날, 아빠 나이 정도 되는 중년 남성 두 명이 나를 불렀다. 기본 안주로 나가는 차가운 콩나물국을 더 달라고 하였다. 양은 냄비를 들고 뒤를 돌았는데 그중 한 명이 내 엉덩이를 툭 쳤다. 순간 깜짝 놀라 그 남자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그 남자는 신경 쓰지 않고 친구와 하던 얘기를 이어갔다. 테이블엔 이미 빈 소주가 세 병이나 있었다. 사장님이 주방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까만 피부에 유난히 주름지고 축 처진 두 눈이 마주쳤다. 마치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는 애절한 눈빛이었다.      


눈물이 왈칵 나올 것 같았다. 나는 놀란 마음을 움켜잡고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 손님에게 가져다 줄 콩나물국을 냉장고에서 꺼내었다. 억울했다. 사장님이 보고 있는데 도와주지도 않다니. 나는 홀에서 안 보이게 뒤를 돌았다. 그리고 입술을 오물조물 움직이며 침을 모아 콩나물국에 쭈욱 하고 뱉었다. 콩나물국을 봤다. 거품이 티가 나는 것 같아 젓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기분이 뭐랄까. 아주 작은 통쾌함이 몰려왔다. 몰래 침을 뱉을 때의 그 쾌감은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복수였다. 하지만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걸 보면 그때 사장님의 눈치를 보며 한 행동과 손님에 대한 미안함이 내 마음에 크게 자리 잡은 듯하다.      


나는 왜 기분 나쁘다고 말로 표현하지 못했을까?

나는 왜 부당한 일에 사장님의 눈치를 봤을까?


눈치 보는 마음의 뿌리는 어렸을 때부터 만들어진 것 같다. 중학생 때, 전라도 깡 시골에서 혼자가 되었을 때였다. 우리 집 바로 위에는 3남매 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중 둘째인 유정이는 나와 동갑이어서 전학 첫날부터 무척 친하게 지냈다. 유정이네 아빠는 개인택시 기사였다. 일주일에 두어 번 정도 시간이 맞을 때면 삼 남매를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그 덕분에 종종 학교에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내가 늦잠을 자고 말았다. 유정이가 밖에서 “미라야 학교 가자” 하는 소리에 화들짝 눈을 떴다. 세수하고 옷 입는데 5분이면 충분히 준비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정이네 아빠 차가 밖에 있는 것을 보고 그냥 너 먼저 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유정이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난 허겁지겁 준비를 하고 택시에 올라탔다. 차에 타자마자 유정이네 아빠가 역정을 내셨다.      


“아니 왜 늦잠을 자냐! 사람을 기다리게 하고 말이야 빨리빨리 일어나야지 뭐 했냐”


내 심장이 엄지손톱만큼 작게 쪼그라들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유정이네 언니가 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유정이네 아빠는 학교 가는 내내 나에게 큰 소리로 꾸지람을 주셨다.     


 ‘나는 피해 주고 싶지 않아서 가라고 했는데. 내가 무얼 잘못했을까. 무얼 그리 크게 잘못해서 부모님한테도 듣지 않는 꾸중을 들어야 하지. 그것도 유정이네 삼 남매 앞에서.’      


나는 몹시 서러웠다. 내게는 아침에 학교 가라고 깨워주는 엄마도 없고, 밥을 차려 주는 사람도, 교복을 다려주는 사람도 없다. 혼자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부모가 없다고 무시하는 걸까. 가슴에서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렸지만 삼 남매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억울함과 서러움을 가득 가슴에 묻은 그날 아침은 내게 큰 상처를 주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목소리가 크고 거친 남자를 만나면 나를 혼내는 것 같아 심장이 반으로 쪼그라든다.       


행여나 늦잠 자지 않을까 하는 트라우마도 생겼다. 이른 아침에 시험 혹은 중요한 일정이 있는 날엔 악몽을 밤새 꾸기도 했다. 늦잠을 자고 화들짝 일어나서 약속 장소로 가는 꿈 혹은 원활하게 그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혹시라도 늦게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초초함이 생기고, 내가 무언가를 잘못해서 꾸지람을 듣지 않을까 하는 눈치 보는 습관이 생겼다.     



이렇듯 어린 시절의 경험은 내가 성인이 되어서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눈치를 보게 만든 가장 큰 사건은 내가 새엄마와 함께 살 때였다. 전라도 시골에서 고등학교 3학년까지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로 올라오면 시골 생활보다 나을 것 같았다. 내가 태어났던 서울이었고 서로 헤어졌긴 하지만 나의 부모님이 계시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그동안 아빠는 결혼을 했고 아빠보다 11살 어린 새엄마와 아이까지 낳아 살고 있었다.      


새엄마는 두 얼굴의 여자였다. 아빠가 집에 있는 오전에는 천사의 모습을 한 현모양처였다. 아빠가 가게에 나가는 밤에는 악마의 모습을 한 주정뱅이였다. 밤마다 술을 마시며 신세한탄을 했다. 술에 심하게 취한 날이면 나에게뿐 아니라 세 살도 안 된 이복동생에게 욕을 하고 폭력을 휘둘렀다. 아빠가 집에 있고 없고의 차이가 분명했다. 그래서 난 매일 아침 눈뜨면 그 여자의 기분이 어떨까 눈치를 보며 일어났다. 저녁에 집에 들어갈 땐 오늘은 그 여자가 또 무슨 짓을 할까 하는 괴로운 마음이 들었다. 그땐 어리석게도 아빠가 또 이혼을 할까 봐 두려움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참고 지냈다.     


아빠의 눈치, 새엄마의 눈치, 친구의 눈치, 사장님의 눈치..

그렇다. 나는 타인의 눈치를 보고 살았다.      


눈치 보는 것이 일상이 되니 잠을 잘 때조차 편하지 않았다. 여행을 같이 갔던 친구가 “너 간밤에 추웠어? 왜 그렇게 불쌍하게 잔뜩 웅크리고 자”라고 할 정도로 난 옆으로 쭈그려 새우잠을 자는 게 습관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항상 척추를 둥글게 말고 팔과 다리를 웅크린 채 잠을 잤다. 그 때문에 내 어깨는 말려 있었고 목은 앞으로 나와 있었다. 컴퓨터나 핸드폰을 다뤄야 하는 직업이 아니었던 나는 직업병이 아닌 생활 습관에 의해 체형이 망가졌다.      


좋지 않은 습관은 통증을 일으켰다. 30대가 되고부터 한쪽 팔이 저리다 못해 남의 팔인 것 마냥 피가 안 통해서 수 없이 잠에서 깼다. 마치, 주사 맞을 때 피가 통하지 말라고 꽉 묶는 고무줄로 몇 시간 내내 겨드랑이를 조인 것 같았다. 시체의 팔이 된 것 같았다.      


낮에는 어깨와 등이 아팠다. 지릿한 통증으로 마치 누군가가 내 왼쪽 어깨 전체를 간질이는 기분 나쁜 통증이 근육 깊숙한 곳에서 느껴졌다. 개미보다 작은 수많은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이랄까. 흰 밥에 식초 한 통을 뿌린 느낌이랄까. 시큰하고 저릿한 느낌이 지속되었다. 매우 기분 나쁜 통증이었다. 그리고 어깨를 올릴 때마다 날개 뼈에서 드르륵 갈리는 소리가 났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양쪽 어깨를 들어 올렸다 내리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한숨을 자주 쉬었다. 엄마가 나를 보며 너 왜 그렇게 이상하게 어깨를 올리는 행동을 하냐며 물었고 젊은 애가 한숨 좀 쉬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아무래도 그 행동이 틱 장애였던 것 같다. 양쪽 어깨를 시도 때도 없이 으쓱 대고 내려놨다. 그러면 어깨가 조금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집에서도 밖에서도 하게 되었다. 한숨 또한 그랬다. 몸이 불편하니 한숨이 계속 나왔다. 과거에는 눈치 보는 마음이 내 어깨를 쳐지게 만들었다면 성인 이 된 이후에는 그 어깨가 만성적으로 굳어져 몸의 통증으로 온 것이다.      


“특별히 언제 아파요?”라고 물어본다면 말할 수 없을 만큼 하루 24시간 내내 계속 아팠다.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그냥 참는 거밖에 몰랐다. 병원에 가도 진통제만 줄 뿐이었다. 난 평생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지 알았다. 조금이라도 편해지고 싶어서 마사지를 받으러 갔었던 적이 있었다. 내가 어깨 통증에 대해서 이야기하니 그 사람은 자신이 있다는 듯, 내 목의 근육을 열심히 풀어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나는 옷을 갈아입지 못했다. 어깨를 들어 올릴 수 없게 되었다. 한쪽 팔이 아예 마비가 된 것이다. 속옷을 착용할 수 없었고 머리도 감을 수 없었다.     


내 몸이 신호를 주었다. 너 정말 심각한 단계이니 어서 치료해 달라고 말해주었다. 병원으로 달려가 주사를 맞고 도수 치료를 받았다. 열 번 정도 치료하니 어깨는 움직일 수 있었지만, 그 이후로도 생활 습관을 고치지 않아 어깨 통증은 고질적으로 왔다. 고통이 매일 지속되니 그것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닌 일상이었다. 부모님에게 혹은 연인에게 폭행을 당해본 사람은 계속해서 그런 이성을 만날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그것이 생활화되면 더 이상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인식하지 못한다. 오히려 폭행에 중독이 된다. 몸에 있는 통증도 만성이 되면 그러려니 하게 되기 쉬운 것 같다.      


나 역시 그랬다. 지난날, 나는 어깨가 아픈 걸 알았지만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통증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게 당연했던 내 마음처럼 내 몸도 나의 눈치를 보았던 건 아닐까. 늘 긴장하고 딱딱하게 굳어 있던 내 어깨가 항상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던 내 마음과 꼭 닮아 있다. 나는 학창 시절부터 눈치를 보면서 내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다. 내 마음이 말하지 못하는 걸 내 몸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었을까. 내 마음의 아픔과 내 몸의 통증을 돌이켜본다. 말하지 못했던 날들을 돌아보니 내 삶에 미안함이 올라온다.

 


이 글은 마음이 힘들었을 때 몸도 아팠던 제 과거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삶이 달라졌습니다. 제 이야기를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브런치북 [서른 살, 조울증 승무원의 ]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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