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내 수업을 듣는 회원님 중 한 분과 식사를 했다. 내 수업을 일 년 정도 들은 회원님이셨다. 내 수업으로 인해 요가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볼 때마다 나를 딸처럼 예쁘다고 칭찬해주시는 어머님이셨다. 내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기에 그날은 함께 식사를 했다. 60대가 다 되어가는 나이라 폐경이 오셨는데 요가를 시작한 후 다시 생리를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소녀처럼 좋아하셨다. 운동에 대한 대화가 오가고 난 뒤, 사적인 질문이 여럿 들어왔다.
내 나이와 사는 곳 그리고 내게 남자 친구가 있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없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나와 동갑인 자신의 둘째 아들에 대해 말씀하셨다. 회사는 어디에 다니고 커피를 좋아한다는 둥 아직 결혼하지 않은 아드님 이야기를 하시며 소개받으라는 뉘앙스로 말씀을 하셨다. 난 회원님의 말씀에 좋은 마음으로 듣고 있는데 갑자기 내 얼굴을 굳게 만드는 질문이 있었다.
“부모님이랑 같이 살아요?”
이 질문을 들으면 난 사실대로 엄마와 둘이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내가 불편할까 싶어 아빠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회원님은 내가 엄마랑 단 둘이 사는 게 신기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시곤 계속 질문을 쏟아내셨다. 아빠는 어디에 계신지, 어떻게 따로 살게 되었는지 그럼 얼마나 자주 가족이 모이는지 물어보셨다. 깊은 이야기는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 것 같아서 나는 이혼했다는 사실만 빼고 에둘러 대화를 마쳤다.
나는 이처럼 부모님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가슴이 턱 막히고 얼굴은 사색이 되어 굳어버린다. 바로 내가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외모, 학벌, 성격, 직업.. 모두 다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어느 자리에서도 나는 나를 떳떳하게 소개할 수 있다. 하지만 부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왠지 모르게 난 가슴이 답답함을 느낀다. 내가 유일하게 노력으로 얻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이고 부모의 일이라 내가 노력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부분이다.
부모의 이혼은 나에게 결핍이다. 이혼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흠이 아닐 정도로 우리나라 이혼율은 꽤 높은 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상황이 아닌, 그 상황으로 인해 내가 겪은 아픔과 상처는 너무도 깊다. 누구에게나 결핍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결핍을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아 성공한다. 하지만 나는 결핍은 없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이 부럽다.
엄마의 소중함과 아빠의 든든함이 그냥 일상인 것처럼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 결핍으로 인해 내가 외로움과 서러움을 굳이 느낄 필요가 있나 싶다. 내가 바꿀 수 없는 부분이기에 친구들과 나를 비교하지 않으려 하지만 부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한 번은 내가 위염으로 고생할 때 친한 친구의 아빠가 즙을 판매하고 계셔서 내게 양배추 즙을 보내준 적이 있었다. 가족 식사 자리에서 친구는 내가 위염으로 고생한다고 말했고 아버지는 양배추 즙을 먹으라고 보내주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아버지가 바쁘신 탓에 친구의 남동생이 내게 택배를 보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친구가 나를 생각해준 마음이 큰 감동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내겐 다른 것이 더 크게 다가왔다. 부러움이었다. 딸의 친구까지 챙겨주는 따뜻하고 자상한 아빠가 있다는 것, 가족 간의 소통과 화합이 참 부러웠다. 친구들과 있을 때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순식간에 난쟁이로 변해버린다. 키도 덩치도 거인처럼 큰 친구들이 이야기하는 세계에 낄 수 없는 난쟁이. 내가 아무리 말하려 해도 그들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다른 세계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나 자신이 초라하다고 해야 할까.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풀이 죽는다고 해야 할까? 그럴 때면 아주 작은 난쟁이가 거인 틈에 홀로 있는 외톨이가 되는 것 같다.
학창 시절에 부모님의 이혼 때문에 초조했던 일이 있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 짝사랑하던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우리 반 반장이었다. 어느 날, 호적을 떼어오라는 선생님의 말에 인생 처음으로 호적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본 적도 없는 할아버지와 여러 낯선 이름들보다 날 놀라게 한 건 새엄마들의 이름이었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있었다. 반장이 분명 이걸 걷을 텐데.. 학교 가기 전 날 밤 수많은 걱정을 했다. ‘호적이 대부분 등본처럼 한 장으로 끝나지 않으니 다들 두껍겠지. 특히나 시골은 식구 수가 많으니 나보다 다른 아이들 호적이 더 두껍겠지. 설마 반장이 넘겨서 보겠어’ 하는 생각이었다.
‘혹시 내가 좋아하는 반장이 나한테 관심이 있어 내 호적을 들춰보면 어쩌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지. 다른 아이들은 우리 부모가 이혼한지도 모르는데.. 들키면 어쩌지..’
하며 근심으로 밤새 잠을 설친 적이 있었다.
성인이 되고 난 후로 이런 일로 걱정하며 잠을 설치지는 않았지만 이제 그 걱정은 더 큰 현실이 되었다. 만약 나에게 시부모님을 만나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한 번도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막상 이 회원님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니 매우 당황스러웠다. 아무 생각 없이 밥을 먹다가 예비 시어머니를 만난 것 같은 상황이 만들어졌다. 엄마랑 단 둘이 살고 있는 것이 눈이 동그래지며 신기하게 물어볼 일인지 미처 몰랐다.
나는 여태 결혼을 전제로 상대방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 적은 없었다. 하지만 난 늘 이러한 상황에 으레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만약 내가 예비 신랑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혹시나 부모님이 이혼하셨는지 물어보면 어쩌지? 뭐라고 대답해야 내가 주눅 들어 보이지 않을까. 머리를 굴려서 드라마에서 본 듯한 멋진 대사를 준비했다. 보란 듯이 당당한 눈빛으로 예비 시부모님을 쳐다보며 말하는 것이다.
“어머니 비록 제가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지는 못했으나 누구보다 바르게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에 어려움을 겪었기에 부모와 가정의 소중함을 더 잘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책임감을 가지고 사랑하는 남자와 따뜻하게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마치 회사 면접이라도 보는 냥 질문에 대한 대답을 여러 번 연습하는 상상을 했다. 조금 우스꽝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내 결핍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싫었다.
어쩌면 자격지심은 인생의 성공 여부에 따라 멋지게 비칠지 아닐지 결정되는 것 같다. 내가 그것을 딛고 성공하면 결핍이 없는 사람보다 더 멋진 일이 된다. 하지만 그걸 딛고 삶을 일어서야 한다는 생각으로 매 순간 긴장하고 힘주어 산다면 어떨까? 내가 그랬었다. 나의 결핍을 덮으려 모든 것에 열심히 살았다. 그래서 몸과 마음에 항상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내 결핍을 감추기 위해 과하게 웃으며 밝은 면만 보여주려 했다. 그랬기에 매 순간 나의 삶은 불안하고 위태로웠다.
이런 초조함과 긴장감은 운동을 하면서 크게 느꼈다. 어떠한 운동을 하던 목 주변의 뻣뻣함을 느꼈고 운동 후 다음 날은 항상 어깨가 결렸다. 또한 복장뼈 주변에 심한 통증을 종종 느꼈다. 척추를 움직일 때마다 가슴 주변이 고무줄로 꽉 조이는 것 같이 매우 불편했다.
원인은 말린 어깨 탓에 가슴 근육이 짧아진 탓도 있지만 아무래도 내 무의식 속에 있는 근심과 걱정이 쌓여서 복장뼈의 근막을 수축하게 한 것 같다. 근막은 뇌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고 있다. 사소한 감정이라도 우리의 몸은 모든 걸 기억하고 저장한다. 내가 체형 탓이 아닌 마음 탓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말린 어깨는 현재에도 똑같이 남아있지만 마음이 편해진 지금은 가슴 통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내 기억 속에 부모님이라는 결핍을 달고 살았다. 내가 스스로 만든 자격지심이다. 나는 부모님의 이혼을 부끄럽게 여겼다. 누군가 나를 조손가정에서 자란 아이와 현재는 편부모 가정에서 살고 있는 사람으로 색안경을 끼고 보진 않을까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가득했다. 현재에도 결핍은 시시 때때로 나에게 다가온다. 아직 예비 신랑이 없어서 걱정할 일은 없지만 언제든 불편한 상황에 대한 대비 태세를 갖추고 있는 내가 조금은 안쓰러운 느낌이 든다.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한 편으로는 나의 이러한 자격지심이 내 삶의 중요한 지표를 마련해준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날들보다 인생의 더 많은 날들을 함께할 반려자를 찾는 데 있어 도움이 될 것 같다. 어려서는 외로움에 남자를 쉽게 만났다면, 이제는 나의 부족한 배경 속에서도 잘 자라준 현재의 나를 존중해주는 남자를 만나려 한다. 우울했던 과거로부터 만들어진 부정적인 마음을 잘 다스리면서 살아가는 나를 존경해주었으면 좋겠다. 나의 배경을 안아주면서, 현재의 내 모습을 존경하고 지지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나는 글을 통해 보여준 내 모습에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기에 이제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생긴다.
나에게 결핍이란 나를 성공하게 만드는 발판이 아니다. 결핍은 나를 삶의 바른 길로 안내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나의 경험을 통해 다른 이의 마음을 공감하고 안아줄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아팠던 경험만큼 다른 사람의 환경을 이해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포용력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훨씬 부드럽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결핍이 있는 나를 사랑하는 힘이 생겼다.
미라쌤의 치유법:)
결핍이 있어도 괜찮아.
아니 결핍이 있어서 더 괜찮은 나로 살아가길 바란다. 말을 안 할 뿐이지 누구라도 결핍이 있기 마련이다. 결핍에서 벗어나려면 그걸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어야 한다. 결핍으로 인해 주눅 들 것이 아니라 이런 경험이 있기에 남들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자. 결핍이 있기에 나를 더욱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또한, 내가 나를 먼저 이해해주면 다른 사람의 환경도 충분히 안아줄 수 있다. 그것은 곧 내가 얼마나 포용력이 얼마나 넓은 사람인지 나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