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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Oct 17. 2020

브레네 브라운의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

 감정에 이름 붙이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한때는 우울함, 무기력감, 허무함, 분노에 대해 파헤쳤던 시기가 있다. 함께 뿌리내릴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게 된 후로 이러한 감정으로부터는 어느 정도 자유롭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 찾아온 감정은 귀찮음이다. 귀찮음이 어떤 색깔인지 내 안에서 어떻게 생성된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다.


  나의 감정의 이름을 붙이는 작업은 나에게 있어 너무나 중요하다. 내가 나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는 것, 더 이상 나에게 존재의 의미를 따져 묻지 않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내가 나의 편이 되어 주는 하나의 방법이다.


  자신이 자기 자신의 편이 되어 주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를 저자는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통해 설명한다.


죽도록 바꾸고 싶은 그것이 나를 나답게 하는 장점이다


우리는 모두 수치심을 느낀다외모자녀양육경제문제가족심지어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어떤 사건 때문에은근히 혹은 대놓고 비난하는 말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 (...)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은 이렇듯 그 특징이 다른 것 같지만나에게 상처를 주고 당황하게 하고 좌절시켜서, ‘나를 보호해야겠다는 강한 절박함을 만들어낸다는 공통점이 있다.(p178)”


  수많은 수치심들이 떠오른다. 그동안 수치심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분류되어 있거나 혹은 어른이 된 지금은 잊고 있었던 기억 저 너머의 감정이 수치심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내 앞에 온다.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 그 수치심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인간은 어차피 평생 외롭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외로운 순간은 있을 수 밖에 없다. 혼자여서 외롭고 혼자가 아니라서 외롭기도 하다. 한평생 가장 오랫동안 가장 가까이 내 곁에 있는 존재는 결국 나 자신밖에 없다. 그런데도 자기 자신을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높은 기준을 들이대며 스스로를 구석으로 내몰고 말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더욱더 외로워진다. 내가 나의 편이 되어 주기 위해서는 이 수치심에 대해 알아야 한다.


  수치심은 때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나에게는 없는 감정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수치심을 느끼게 만드는 수치심 촉발제가 필요하다는 속성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촉발제를 통해 드러난 수치심은 수치심이 아닌 다른 이름이 되기도 한다. 만약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타인을 향하게 되면 분노나 화라는 이름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자기 자신에게 향했을 때 그것은 수치심이 된다. 또한, 수치심은 보통 나약함이라 여겨지기 때문에 선명하게 드러나기를 거부하는 고통이 되고, 그래서 침묵과 은폐를 조장하여 자기도 모르게, 생각과 감정, 행동이 수치심을 감추는 데 온 힘을 쏟게 된다. 또한 수치심은 자기 자신의 취약점이다. 하지만 저자는 강조한다. ‘취약하다’는 게 ‘나약하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이러한 수치심의 속성으로 인해 수치심은 쉽게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강박관점은 우리가 가진 한계나 결점이 어떻게 강점으로 연결될지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중요한 깨달음을 하나 얻게 된다. ‘죽도록 바꾸고 싶은 그 무언가가, 다른 관점으로 보면 나를 나답게 하는 장점이기도 하다’는 것!(p270)”


  진짜 강한 사람은 약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약점조차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나아가, 음지에 꼭꼭 숨어 있는 취약성은 나약함에 불과하지만, 양지로 꺼내어 습함을 거둬낸다면 취약성은 나약함이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만의 색깔이 되고 특성이 된다.


나의 편이 되다


  나는 나의 편이 되고 싶다. 하지만 내 편이 되어준다는 것이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나를 믿어주고 나를 응원해주는 내 편이 되어 주고 싶다는 의미이다. 포기하고 싶을 때, 좌절했을 때,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도 나의 편이 되어, 주저앉아 버린 나를 옆에서 어깨를 감싸안고 기다려 주고 싶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나아가 그 마음으로 내가 누군가의 든든한 편이 되어 주고 싶다는 의미이다.


내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기를 바라고 어떤 방법으로 가고자 하는지 확인하려면, ‘자기수용’ 능력이 필요하다자기수용 수준이 높은 사람은 자기 능력과 현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욕구단점감정충동 등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학대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이 자기수용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근거 다지기이다.

  여기서 근거는 존재의 근거다지금의 나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근거이며또한 내가 원하고 목표로 하는 어떤 모습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근거다자기존재의 근거를 잘 다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내린 결정에 대해 억지로 변명해야 한다거나 자기를 방어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이 줄어들고 자비의 시선으로 자신을 볼 수 있게 된다근거 다지기는 또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억지로 사랑과 인정소속감을 얻기 위해 안달복달하지 않도록 해준다.(p213~214)”


  길지만 곱씹을수록 좋은 문장이라 전부 인용했다. 나는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떻게 가야 하는가. 나는 과연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옳게 살아온 것일까. 이런 고민들을 짊어지고 그 무게에 허덕일 때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나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이다.

  자신의 좋은 점뿐 아니라 단점, 감정과 욕구 등 지나치게 학대하지도 거부하지도 않고 현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나는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뿌리 내릴 수 있게 된다. 나의 존재의 의미를 더 이상 외부에서 찾지 않고 존재 자체에서 의미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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