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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Oct 17. 2020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문학과 지성사)

4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의 긴 여행이 끝났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제부터 여행이 시작된 것일 게다. 내 인생 속에서는.

책을 읽고 책 사이사이마다 해석되지 못한 문장들, 품고 싶은 문장들이 있는 곳마다 종잇조각들을 꽂아두었다. 책의 두께만큼이나 꽂혀진 조각들을 하나씩 빼내며 하얀 한글 문서 위에 한 글자 한 글자 새겼다.

서평을 쓰기 위해 그 하얀 화면의 글자들을 읽고 또 읽고 서평을 쓰지 못하고 다시 파일을 닫았다. 그리고 다른 책들로 마음을 옮기고 다른 책들의 서평을 썼다. 그러다 또다시 이 책의 서평을 쓰기 위해 다시 조각들을 읽는다. 그렇게 책들을 가슴에 한 글자 한 글자 새겼다.

지인과 이 책에 대해 조각조각 이야기 나누며 ‘작가의 몫, 독자의 몫, 신의 몫’이라는 블로그 이웃의 댓글 속 한 구절을 떠올렸다. 작가는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었던 것일까. 신은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알게 하고 싶었을까.

   

‘나는 너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가’


여러 날들을 이 책에게 마음을 주고, 지인과 이야기 나눈 끝에, 이 문장이 나에게 내려왔다.

나에게는 오만한 병이 있다. 나는 이 병을 오만함이라 부른다.

이제는 이 병을 떠나고 싶기 때문이다.

온전한 사람보다는 조금 결핍된 사람에게 마음이 쓰인다.

그 결핍의 공간에서 나의 자리를 찾는 병이 있다. 누가 봐도 완벽한 존재에게는, 설령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떠한 이익을 줄지라도 아니 이익을 준다면 더더욱 나의 자리를 느끼지 못한다. 이를 누군가는 연민이라 부른다. 연민도 사랑의 한 형태라고 말하지만 이는 어떤 면에서 내 결핍의 그림자일 게다. 낮은 자존감의 표시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 있고 채워 줄 수 있고 나로 인해 변하게 할 수 있을 거라는 오만함이 이끈 감정이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나는 그렇게 부르고 싶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누군가로 인해 행복하게 되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내가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그 변화, 행복은 오로지 자신만의 몫이다.

만약 누군가가 나로 인해 '주어진 행복'을 느꼈다면, 이 말은 곧 내가 떠난다면 그 행복도 사라진다는 의미가 된다. 누군가에게 '얻은' 행복, 그 대상의 부재는 곧 나의 행복의 빼앗김이 되는 행복. 그것이 진짜 행복일까. 

참다운 사랑이란 일방이 일방을 구하는 일이 아니라 그 공동의 이익을 수락하는 데서만 가능한 것이었어요. (p406)”


조 원장은 나병에 걸려 섬에 내몰리듯 들어온 사람들에게, 나 역시 당신들의 처지가 위로를 받아야 할 것인 줄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p180)”라고 말한다.

그리고 섬사람들을 대표하는 황 노인은, 섬사람들을 대변하며, 지난 수십 년 동안 문둥이가 아닌 사람으로 이 섬을 나가기 위해 갖은 시련을 겪어 왔지만 위정자가 우리를 속였고 원장들이 속였고 병원 직원들이 우리를 속였소거짓 얼굴을 한 자선가들이 우리를 속였고 (중략심지어는 고향의 육친들과 교회의 형제들마저도 우리를 속이거나 버리고 돌아서기 일쑤였소그리고 마지막엔 문둥이 자신들이 자신을 속이고 자신을 배반했소.(p182)”라고 말한다.


나는 묻고 싶다. 이들은 위로받아 마땅한가. 동정 받아 마땅한가.

나병에 걸려, 세상과 섞이지 못하고 미래조차 자유롭게 꿈꿀 수 없는 이들, 상처투성이의 몸과 마음을 끌어안아야만 하는 운명의 굴레를 감당해야만 하는 이들을 우리는 동정해야만 하는가.

이들을 가장 동정했던 것은 누구일까. 그들을 돕고자 나섰던, 비록 종국에는 그 선한 마음이 왜곡되었을지언정 그들에게 동정을 품고 그들을 돕고자 했던 위정자며 원장, 자선가들이 그들을 가장 동정했던 것일까.

어쩌면 그들을 가장 동정하고 있는 사람은 그들 자신이 아닐까.

그들 스스로 자기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여기며 자기 자신은 동정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 스스로를 폄하했던 것은 아닐까.


가장 무서운 조합은,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과 자신의 힘을 오만하게 품는 사람의 조합이라 생각한다.

나의 상처가 타인의 더 큰 아픔보다 더 아픈 법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나의 아픔밖에 보지 못하며 타인의 아픔과 괴로움을 느낄 줄 모르는 사람,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이 나는 가장 가엾다.


나는 너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

나는 당신과 있을 때 행복하지만, 그 행복은 당신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는 동안 ‘우리가 함께 만든’ 행복이다. 당신이 있어서 행복하지만 당신이 없어도 나는 나 그대로 충분히 가치 있는 존재이며 당신이 없어도 나는 행복할 수 있다.


나병에 걸린 섬사람들을 불행하다 판단하고 그들에게 천국을 건설해 주고, 행복을 만들어주고자 했던 사람들의 마음은 설령 그 마음이 사랑으로 행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미 그 시선에는 그들을 불쌍한 자로 결론지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더불어 자기 자신은 행복한 자이며, 자신은 천국에 있는 자라는 사실을 무의식 중에 느낀 것은 아닐까.

반대로, 나의 행복, 나의 천국을 누군가의 힘을 통해 받겠다는 자세는, 나 스스로는 나의 행복을 찾을 능력이 없다는 무기력감, 혹은 나 자신은 누군가에게 도움 받아 마땅하다는 자기 연민의 표현은 아닐까.  또한 내가 짊어져야 할 나의 운명을 누군가에게 ‘기대어’ 조금이나마 편하게 살고 싶다는 도피를 무의식 중에 표현한 것은 아닐까.


죽음이란 것이 이 섬에 붙박인 저주스러운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는 마지막 방법으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병이 나을 수 없다고 생각되던 시절이 질병이야말로 하늘의 저주를 받은 추악한 유전성 질환이라고 생각되던 시절그리고 그러한 병을 안고 이 잊힌 남해 한끝 작은 섬으로 끌려들어 와 절망과 비탄 속에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가혹한 노력 착취를 당해야 했던 시절그런 시절 이곳 사람들에게는 이 섬과 이 섬의 무서운 질곡을 벗어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주어져 있었다하나는 죽음을 무릅쓰고 바다를 헤엄쳐 나가는 길이었고다른 하나는 그러한 운명을 조용히 감수하고 나서 때가 되면 새로운 복락과 위안이 약속된 주님의 날을 맞는 것이었다.(p85)”


요즘 운명에 대해 생각한다.

나의 운명에 대해, 그리고 그 운명의 무거움과 벗어날 수 없음과 무기력함에 대해 생각한다.

운명이라는 무게를 떠올리면 가슴 언저리가 답답해진다.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그 노력의 대가는 반드시 돌아온다고 믿었던 젊음의 무모함을 조금씩 잃어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마저 든다. 이 운명의 무게로 인해 허무함이 커지고 무기력이 커지면서, 끊임없이 나의 존재의 의미와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나에게 다그치는 내가 숨 막힐 때도 많다. 

운명이라는 투명한 밧줄에 매여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이 나를 요즘 무기력하게 만든다.


사람과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이 -그 거리가 얼마나 깊고 멀다는 걸 전 섬을 나온 후로부터 더욱더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p379)”


상욱은 편지에서 위와 같이 말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운명의 거리. 나의 운명은 철저히 나의 몫이다. 내 몫의 운명은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부모는 자식의 눈물을 닦아주고 손을 잡아주고 안아줄 수는 있지만 대신해서 아파줄 수 없다.


조 원장을 비롯해 그전의 원장들이나 위정자들은 나병환자들이 사는 그 섬을 천국으로 만들어주려고 한다. 그들이 만들어 주려고 하는 모습은 분명 천국이다.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정작 삶을 감당해야 하는 그 나병환자들에게도 그것은 천국일까.

이 내용을 읽으며 부모와 자식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섬은 실상 이제까지 수십 년 동안 오로지 원장 한 사람의 일사불란한 통제와 규제에 의해 다스려져오고 있었다.(p364)”


모든 부모들은 ‘사랑’으로 아이들을 교육한다. 사랑하는 자식이기 때문에 가장 안전하고 완벽하고 튼튼한 미래를 만들어주려고 한다. 부모들이 그리는 천국의 모습은 틀리지 않았다. 우수한 성적으로 선생님께 모범생으로서 칭찬받고 친구들에게 똑똑하다는 말을 들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서 좋은 대기업에 들어가 예쁘고 잘생긴 배우자를 만나 건강하고 똑똑한 자식을 낳고 한 평생 부유하게 사는 것. 그것은 분명 행복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 행복한 천국의 모습은, 너의 천국이지 나의 천국은 아니다. 그것이 문제다.

학교에서 1등 하는 것이 부모에게는 천국의 한 모습일지 모르지만 그러한 성적보다는 더 소중한 무언가를 품으며 사는 삶이 천국이라 생각하는 아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에게는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운명이 있다. 그 운명에는 도망가고 싶을 만큼 저주스러운 운명뿐만 아니라 그 아이가 아니면 아무도 해낼 수 없는 그 아이 고유의 빛깔을 지닌 재능을 비롯해, 행복과 기쁨, 그리고 슬픔과 불안과 두려움마저도 들어 있다. 그 운명의 빛깔는 오로지 그 아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부모는 자신의 아이가 보다 더 그 아이답게 자라도록 도울 수는 있지만 아이의 운명을 ‘만들어 줄’ 수는 없다.


조 원장의 목소리를 빌려 작가는 우리에게 묻는다.

그럼 이 섬에선 장차 무엇으로 행하고 무엇으로 이룩함이 옳은 길입니까?(p337)”


이 질문에 대해 저자는 황 장로의 입을 통해 답하지만 나는 그 부분이 이 질문의 답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사랑과 자유, 그것으로 결론짓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섬 전체가 하나의 운명 단위로 집단으로만 존재해온 원생들이 개별적인 독립 인격체로 분화되어가는 현상은그 인격체의 조화에 의한 새로운 질서에의 지향은이 섬을 지금까지 지탱해온 획일적인 지배 질서로부터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해방의 징후였다.(p365)”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위의 문장에서 나는 답을 찾고자 한다.

나는 너를 행복하게 할 수 없으며 아무리 사랑한다할지라도 그 누구도 너의 운명을 대신 짐 지어줄 수 없다.

나는 나의 행복과 운명, 삶의 무게를 내가 개척하고 책임지고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도 의무도 능력도 있다.


난 이런 생각을 자주 해왔어요눈을 뜨고 찾아내려고만 하면 이 땅 위엔 아름답고 귀한 것이 얼마든지 많을 거란 생각 말이오하지만 그 아름답고 귀한 것들은 우리가 눈을 뜨고 찾아내지 않으면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 보이질 않습니다볼 수가 없습니다누구의 눈에도 띄어본 일이 없어 우리 눈앞에서 숨어 사라져버리는 것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p353~354)”

이 서평의 마지막은 위의 문장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어려운 말로 서평을 쓰기에는 내가 아는 세상이 너무 좁다. 내가 겪은 세상 또한 너무 좁다. 김연수 작가가 자신의 책에서, 정확하게 쓸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감정뿐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나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온전히 소화해낼 만큼의 깊이는 갖고 있지 못하다.

내가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이 내가 쓸 수 있는 글의 전부이다.

그래서 감히 독자의 몫이라는 위안을 삼으며 위의 문장으로 서평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이 책의 서평을 쓰기 위해 고심하던 순간부터 결정했던 문장이기도 하다. 그때는 이유를 몰랐다. 그저 세상은 그렇게 생각만큼 오염되지 않았고 내 운명도 그렇게 무겁지 않으며 나의 친구도 그렇게 불안한 미래는 기다리고 있지 않으며 세상은 생각만큼 그렇게 불행하지 않다고, 잘 찾아보면 생각보다 미래는 밝다고, 나에게, 우리에게, 너에게, 이 말이 필요한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존재의 의미를 추궁하는 나 자신 때문에 무기력과 허무함, 무상함에 마음이 쓸려 가라앉기도 한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당한 것들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좌절하기도 한다. 더 이상 내 곁에 없는 신을 대신해 나의 허전함을 채워줄 무언가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 홀로 견디어야 함을 알게 되며 씁쓸한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아프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 또한 많다. 많다고 믿고 싶다. 그렇기에 이 책의 서평은 위의 문장으로 끝나야 한다. 끝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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