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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플슈룹 Oct 13. 2024

삭제할 수 없는 기억

전화로 만난 사이

“네, 상담센터입니다”


전화를 받았는데,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답변이 없어서 전화를 끊겠다고 말한 후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얼마 후 같은 번호로 전화가 다시 왔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수화기 너머로 이상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위급한 상황인 줄 알고 다급한 목소리로 무슨 일이냐고 여러 차례 물었다. 다시 수화기를 귀에 바짝 붙이며 더 집중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전화기에서 들리는 신음소리가 이상했다. 소리의 정체를 알아채자마자 이번에는 내가 전화를 끊었다. 이런 전화를 처음 받아봐서 머릿속이 새까맣게 변했다. 할 수 없이 상담센터에 있는 남자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전화를 대신 받았던 남자 선생님이 가만히 소리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이런 전화 그만하고, 얼른 컴퓨터 꺼요. 지금 어디에서 전화하는 거예요?”


남자 목소리가 들리자, 전화를 바로 끊어졌다. “이 녀석, 아마도 야동 보면서 전화했을 확률이 높아요. 이런 전화가 종종 올 거예요. 여자 선생님을 노리고 전화하니까 당황하지 말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받으시면, 오히려 전화 한 아이가 당황해서 끊을 수도 있어요.” 얼굴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조롱당한 기분과 괘씸한 마음에 분하기까지 했다. 번호를 메모해두고 전화가 다시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후 한동안 전화는 오지 않았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기다리던 전화번호가 모니터에 떴다.


 “네, 상담센터입니다.” 역시나 희미하게 신음 소리가 들렸다. 당황하지 않고 나는 말했다. 

 뭘 보고 있는지 모르지만 대화가 하고 싶다면 당장 컴퓨터 끄라고 말했다. 계속 소리가 들렸지만, 내가 반응이 없자, “죄송해요.”라고 말했다. 목소리를 듣고 나니 안심이 됐다. 혹시 아이가 전화를 끊을까 봐 물었다. “이제 괜찮아요. 지금 뭐하고 있었어요?” 


아이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고 견디다 못해 자퇴 한 18살 청소년이었다. 집에 있고, 부모님은 일하러 나가서 혼자 있었다. 부모님은 귀가가 늦을 때가 많아서 집에 혼자 있을 때가 많다고 했다. 혼자 집에 있을 때 무엇을 하냐는 질문에 아이는 침묵했다. 그래서 기다렸다. “선생님, 저 너무 괴로워요. 야동을 보면서 자위하면 잠시라도 괴롭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어요.”


그 아이가 갖고 있는 괴로운 기억을 삭제할 수 없지만, 괴로움을 나누고 싶었다. 이야기해 줄 수 있냐는 질문에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환기가 필요했다. 방의 구조가 어떤지 물었다. 방안은 어둡고, 컴퓨터 모니터만 방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고 했다. 방 밖을 몇 번이나 나가냐는 질문에, 화장실 갈 때, 밥 먹으러 갈 때만 나간다고 했다. 아이는 부모님이 와도 대화하지 않았고, 방에만 머물렀다. 오로지 컴퓨터만 붙잡고 있었다. 방에서 나가고 싶지도 않고,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아이의 말에 ‘대화할 상대가 필요하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짧은 통화였지만 아이의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걸 여러 번 느꼈기에 아이에게 상처가 될 만한 질문은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을 시작으로 이 친구의 말동무가 되겠노라. 마음먹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학생에게 위로도 되지 않을 테고, 도움도 되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그러나 확실하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있어요. 나는 늘 이 시간에 있어요. 답답하고 힘들 때, 대화가 하고 싶을 때 언제든 전화해요. 기다릴게요.”


한참을 머뭇하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한 아이는 전화를 끊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는 꾸준하게 전화했다. 아이와 대화하면서 점점 아이 목소리에 힘이 붙는 걸 느꼈다. 조금씩 아이가 좋아지고 있었는데, 내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을 그만두게 됐다. 이 사실을 아이에게 말해야 하는데, 쉽사리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말을 하지 않고 그만두면 아이가 받을 상처가 커서 많이 힘들어할 걸 생각하니 고민이 깊어졌다. 결국 솔직하게 말하길 선택했다. 이제 어떻게 하냐는 아이의 말에, 난 내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언제든 전화하라고 말했다. 아이는 반기는 목소리로, 


 “그래도 되는 건가요?”

 “원래는 안 되지만 우리는 특별한 사이니까 말해주는 거야” 


싱글벙글 웃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니 안심됐다. 이후 아주 가끔 아이와 메시지를 주고받았고 목소리도 들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참 연락이 닿지 않았다. 걱정하던 어느 날, 아이에게 연락이 왔다. 하고 싶은 공부가 생겨서 대학에 진학했고, 여자 친구도 생겨서 하루하루 즐겁게 지내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곧 군대에 가는데 잘 적응할지 걱정이라는 아이의 말에 자식을 군대 보내는 엄마 마음이 이런 걸까? 싶을 정도로 걱정이 됐다. 그래도 여자 친구가 있고, 이보다 더 어려운 시기도 잘 이겨냈으니 아직 닥치지 않은 일에 미리 걱정하지 말자고 격려했다. 시간이 한참 흘러 군대도 제대하고, 직장도 다니게 된 아이와 연락은 더 뜸해졌다. 잊은 건 아니었지만, 나도 바빠서 연락을 자주 못했다. 지금은 연락이 아예 끊겼고, 가끔 SNS를 통해 행복한 일상을 보내는 모습을 보며 안심했다.


양육을 하는 가장 큰 목표는 아이의 독립과 자립이다. 비록 내가 부모도 아니고, 얼굴 한번 본 적 없지만, 아이가 자립해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고 사는 것 같아 기뻤다. 한편으로 내가 크게 해준 것도 없는데, 아이가 어려움을 잘 딛고 일어나서 고마운 마음도 컸다. 비록 짧은 인연이었지만, 한 사람의 인생에 내가 잠시 머물며 둥지가 되어준 것 같아 감사하다. 그 아이도 좋은 어른으로 성장해서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길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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