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웠지만, 꼭 해야했을 말
센터장님 안 계세요? 내가 센터장님이 보고 싶어서 왔는데
수희 아빠는 오늘도 술을 마신 채, 한 손에 간식거리를 들고 센터에 왔다. 그리고 나와 꼭 커피를 마시려 했다. 술을 마셨지만, 좋은 마음으로 간식까지 사들고 온 학부모에게 불편함을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아빠가 왔다고 싱글벙글 웃는 아이 앞에서 더 어려운 일이다. 처음에는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지만, 술을 마신 상태로 센터를 찾아오는 건 막고 싶었다. 이날만큼은 끝을 보겠다는 마음으로 수희 아빠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아버님! 아이들 예뻐하고, 저희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이곳은 아이들이 있는 곳인데, 오실 때마다 술을 마시고 오셔서 불편합니다. 수희한테도 교육상 좋지 않으니, 다음부터는 그냥 오시면 좋겠어요.”
내 말을 들은 아빠 표정이 싹 바뀌었다. 혹시나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두려웠다. 그런데 오히려 미안하다며, 그렇게 생각하는지 몰랐다며 수희 아빠는 정중하게 사과했다. 나도 화내면서 말해 미안하고 말을 건넸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수희가 “선생님, 죄송해요.”라고 덧붙였다. 사실 아이가 미안할 일이 아니었다. 상황에 대한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아서 수희와 교실에 마주앉았다.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도 못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수희 잘못 아니니까 그렇게 있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수희에게 생각하지도 못한 답변을 받았다.
“사실, 선생님이 계속 웃고 있어서 괜찮은 줄 알았어요.”
수희는 아빠를 향해 항상 웃고 있는 나를 보며 괜찮은 줄 알았던 모양이다. 사실은 내 마음이 어땠는지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아이의 마음을 잘 다독여주었다.
사실, 수희네 집은 나에게 아픈 손가락 같은 곳이었다. 수희 엄마는 10년 이상 한국에 사는 베트남 사람이었지만, 아직도 한국어가 서툴렀다. 수희 아빠는 한글을 읽지 못해서 학교와 센터에서 나가는 전달사항을 알 수 없었다. 시급했다. 아이를 제대로 돌봐 줄 사람이 없었다. 수희 엄마에게 아이를 위해서라도 한글을 배울 것을 권했지만, 매일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남편에 대한 불만만 가득했다. 가장 피해를 보는 건 수희였는데, 방법을 찾아야했다. 결국 부모가 나서지 않으니 아이를 단단하게 훈련시킬 수밖에 없었다.
센터에서 월 1회 발행되는 가정통신문이 있다. 각종 행사, 캠프, 수업 준비물, 동의서 등 전달사항이 잔뜩 담겨 있다. 집에서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수희가 직접 해야 했다. 가정통신문이 나가는 날에는 수희를 따로 불러서 한 문장씩 읽어주고, 꼼꼼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아이가 이해했는지 설명하게 했다. 중요한 건 학습이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웠던 수희는 자신감이 점점 떨어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수희의 문해력의 향상을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국어 활동을 했다. 다른 어린이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수희에게 할애하고, 기다렸다. 이런 우리의 노력이 통했는지 수희는 조금씩 공부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공부를 마친 수희가 이런 말을 전했다. “사실, 공부내용이 이해도 안 가고, 기다려주는 사람도 없어서 힘들었어요. 그런데 센터 선생님들이 기다려주고 꼼꼼하게 알려줘서 너무 감사해요.” 수희의 진심이 물씬 묻어나는 말이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전혀 상관없어.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방법이 있거든. 수희는 지금 그 방법을 찾아가는 중인 거야.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하자. 우리가 옆에서 도울게.” 남들보다 시간이 몇 배나 필요한데,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수희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런 아이를 위해서 우리도 열심히 힘냈던 기억이 있다. 수희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 날마다 좋은 선물, 맛있는 걸 먹었지만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만약 부모님이 보다 더 적극적으로 우리와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분명 남는다.
아이에게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경제적인 여유보다 아이 성장에 보다 더 중요한 밑거름이 되는 것은 바로 안정적인 돌봄과 긍정적인 상호작용이다. 원하는 장난감을 사주는 것 보다 지금 당장 우리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채고 그것을 채워주는 것을 목표로 했으면 좋겠다. 수희는 서툰 모국어로 인해 다른 사람과 깊이 있는 대화를 어려워한다. 그리고 많은 정보가 쏟아지면 정보처리가 빨리 되지 않아서 힘들어한다. 이런 수희에게 당장 채워야 하는 것은, 원활한 의사소통 연습이다. 이 연습을 부모님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빨리 한글을 배우고 구멍을 메워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수희의 성장은 느리게 이루어지고 있다. 내 아이의 어려움을 보면서도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을 한다면 접어두자. 내가 외면하면, 남이 나서지 않는다는 점 명실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