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퍼플슈룹 Oct 13. 2024

그거 꼭 아이들이 해야 할까요?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해 보기

다음 주부터 저녁 먹은 접시를 아이들이 직접 설거지하면 어떨까요?



이 한마디에 회의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동료 사회복지사들이 폭풍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애들이 설거지하면 결국 어른이 다시 한번 봐야 해요. 시간 낭비 아닐까요?”

“갑자기 애들한테 설거지시킨다고 부모님들이 아무 말 안 할까요?”

“애들이 직접 설거지하면 시간이 오래 걸려요. 애들 보내고 뒤에 일할 시간이 부족해요.”


하나같이 전부 안 되는 이유를 찾느라 바빴다. 아무리 생각해도 번거롭고, 이중일인데 굳이 아이들에게 설거지를 맡길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특히 부모님들의 항의가 몰릴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일리 있는 의견이었다. 싱크대가 하나밖에 없는데, 아이들 25명이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닌데, 시도도 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사회복지사들의 태도에 몹시 서운함을 느꼈다. 난 굽히지 않고 자치회의에 안건으로 올렸다. 고맙게도 아이들은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싫다는 의견을 낸 아이들도 분명 있었지만, 다수가 찬성했기에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관건은 시간이었다. 40분 이내 어린이 25명이 저녁 먹고 설거지까지 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조금만 부지런하게 움직여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론과 실제는 역시 달랐다. 늦게 먹는 건 기본이고, 밥 먹다가 집에 가는 아이, 밥 먹고 태권도 가는 아이, 생각보다 더 뒤죽박죽이었다. 특히 설거지가 처음인 아이들을 지도하는 일은 더 힘들었다. 싱크대에 선 아이들은 설거지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을 들어도 우왕좌왕했다. 첫날은 결국 선생님들이 했다. 다음 날 모여 설거지하는 방법을 꼼꼼하게 알려주고 다시 도전했다. 제법 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여전히 쩔쩔매는 아이들도 있었다. 두 손가락으로 수세미를 높이 치켜든 희철이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수세미가 이렇게 더러운데 어떻게 만져요? 윽! 난 못해요.” 

 “너희들이 먹고 남은 음식이 그릇에 그대로 있고, 그것을 닦다가 수세미에 묻은 거야. 더러운 거 아니니까 그냥 하세요.”


희철이는 투덜대며 했다. 설거지를 시작한 지 한 달이 넘어갔지만, 시간은 단축되지 않았고 아이들에게 변화는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선생님들이 다 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이대로 이어가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가며, 선택에 대한 확신이 흐려지던 중 아중이 엄마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요즘 아중이가 집에서 설거지를 해요. 아중이가 설거지하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 기특한 거 있죠. 저는 이런 생각을 못했는데, 센터에서 해 주니 너무 좋아요. 우리 애가 잘 크고 있는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갈팡질팡 하던 내게 실낱같은 희망이 보였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흔들리던 마음을 다시 붙잡고 설거지를 이어서 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의 한계로 결국 설거지는 접었다. 다음 활동을 고민하던 중, 요리 활동을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요리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눔까지 이어지면 좋겠다는 작은 포부를 동료들과 나누었다. 


“아이들이 불과 칼을 쓰면 위험한데, 괜찮을까요?”

“뜨거운 물에 아이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세요.”


역시나 위험하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위험변수는 분명 있지만, 어린이들은 불과 칼이 위험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다만, 말로만 들었을 뿐 직접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막연하다. 이때 필요한 것이 충분한 사전교육, 어른의 긍정적 시선이다. 칼을 어떻게 쓰면 안전한지, 불을 다룰 때 조심할 점, 뜨거워진 냄비를 만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물이 끓을 때 뚜껑을 어떻게 여는지 등 아주 작은 것부터 집중해서 사전교육을 하면 아이들은 그대로 실천한다. 물론 사전교육을 한다고 해서 모두 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뚜껑을 열다가 뜨거운 열기에 놀라기도 한다. 물을 너무 많이 부어 라면 국물이 한강이 됐을 때 아이들은 고민한다. “국물이 싱거운데 이때 뭘 넣으면 좋을까?” 라면을 더 넣든, 다른 재료를 더 넣든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아이들은 각자의 능력치를 올리게 된다. 이때 어른은 옆에서 오류를 함께 찾고, 아이들에게 안전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도록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기만 해도 된다. 그러나 이 과정은 꽤나 길고 어른에게 인고의 시간이다. 또 힘들고 귀찮기도 하다. 그러나 어른들의 지나친 불안과 걱정 때문에 어린이들이 경험해야 할 시행착오와 실패를 막는 것은 어린이들의 건강한 성장을 막는 것이 아닐까? 기왕이면 가족, 학교 등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충분하게 경험하게 해 주면 어떨까? 



사실, 이렇게 생각게 된 이유는 온실 속 화초로 성장한 내 어린 시절 경험 때문이다. 엄마는 무엇이든 알아서 해 줬다.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 필요 없는 건 뭔지 엄마는 알고 알아서 해줬다. 밖에서 사 먹는 음식은 지저분하고 불량식품이니 못 먹게 했다. 나이가 아무리 먹어도 출근하는 딸 턱 밑에 아침밥을 챙겨줬다. 뭐든 알아서 다해주는 엄마였다. 세상은 위험하니 부모 그늘에서 안전하게 있다가 결혼하라고 말하는 부모님 덕분에 나는 고민할 일도 선택할 일도 많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살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학교를 벗어나 사회에 나와 보니 순간순간 선택해야 할 일이 태산이었다. 그 나이 먹도록 이런 것도 안 해보고 뭐 했냐는 질책과 비난을 온몸으로 받아야 했다. 선택이라고는 해 본 적 없던 내가 늘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고, 실패했을 때 좌절이 상당히 컸다. 그 좌절 끝에는 부모를 향한 원망이 눈덩이처럼 커져 있었다. 


 ‘대체 나를 왜 이렇게 키운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험한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이 다칠까 불안하고 걱정이 컸던 어른들의 마음, 이해한다. 다만, 모든 걸 알아서 해준 탓에 능력치가 올라가지 못하는 아이를 생각한다면, 어른은 분명 바뀌어야 한다. 지나친 불안과 걱정, 조급함을 내려놓고 믿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어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신중하고 진지할 때가 많다. 어른은 그저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고 기다려주며 안전하다는 사인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전 05화 삭제할 수 없는 기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