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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플슈룹 Oct 13. 2024

어린이의 계획

어른의 인내

학교에 종례시간이 있듯, 지역아동센터에서도 종례를 통해 하루 일과를 짚어보고 다음 날 일정을 공유한다. 그날은 이사를 앞두고 3일 휴가를 쓰게 됐다는 내 일정을 아이들에게 공유했다. 내 말을 들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센터장님, 이사 잘하고 오세요.” 하며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 아이들이 고맙고 기특해서 꼭 안아주었다. 종례가 끝나면 아이들은 저녁을 먹고 집에 간다. 집에 가는 아이들 틈에서 희영이가 내게 그림을 건넸다. 그림에는 “예쁜 집과 새집에서 행복하게 사세요.”라는 글씨와 그림이 있었다. 희영이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서 무척 행복했다. 그런데 이런 행복은 불과 7년 전만 해도 꿈도 꾸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아이들의 행동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지역아동센터에서 두 번째 근무를 시작했다. 처음 만난 직장 동료는 대학 졸업 후 인턴 1년을 마치고 입사한 신입사원이었다. 그녀는 아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게 익숙하지 않아 선생님과 친구 같은 관계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신입사원과 함께 야생마 같은 아이들을 돌보기란 쉽지 않았다. 당시 나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터라 월요일 오후에 자리를 비워야 했다.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전날 있었던 이야기를 듣느라 바빴다. 내가 자리에 없는 걸 눈치 챈 아이들은 마치 정글의 야생동물처럼 서로 물어뜯기 바빴다. 아이들 틈에서 겨우겨우 자신의 자리를 지켜가던 그녀를 바라보는 내 마음도 조마조마했다. 자리가 잡힐 때까지 휴가 없이 지냈고, 교육과 회의로 자리를 비우게 되더라도 끝나기가 무섭게 센터로 뛰어갔다. 그 후로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나니, 이제는 휴가를 간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될 정도 아이들이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물론 동료도 충분하게 성장해 있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쉽게 입을 떼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아이들이 물었다.


“선생님 쉬는 날이세요? 오늘은 안 오세요?”


예전과 다르게 아이들은 우리가 없으면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솔직해질 때가 됐구나.’라고 느낀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아이들에게 휴가를 가기 전에 미리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변화가 생겼다. 어른들은 휴가를 왜 내는지, 휴가 때 무엇을 하는지 아이들이 궁금해 했다. 여행을 다녀온 뒤에는 어디를 여행하고 왔는지, 무엇을 보고 왔는지 들려줬다. 아파서 휴가를 썼다면 컨디션이 어떤지도 이야기해 줬다. 제일 강조했던 건 휴가를 왜 쓰는 것인지, 휴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였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너희들도 하루하루 힘들고 바쁘게 보내니까 한 달에 한 번씩 휴가 쓸 수 있게 해줄게.” 


아이들은 몹시 기뻐했다. 하지만 어른이 일하러 나가고, 아이가 혼자 집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휴가를 쉽게 줄 수 없었다. 반면, 집에 어른들이 있다면 얼마든지 휴가를 쓸 수 있었다. 대신 휴가 계획을 미리 말하도록 했는데, 이것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아이가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휴대전화 하는 게 다였다. 아이들도 집에서 뭘 하며 쉬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당연한 얘기였는데 아이들이 알아서 잘하리라 생각했던 내가 문제였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자신의 시간을 계획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끝에 다가올 방학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방학 기간 동안 시간을 계획하는 연습을 하겠다고 미리 말하고 방학을 맞이했다. 방학식 당일, 들뜬 마음으로 아이들은 센터에 왔다. “자, 방학 숙제 계획 세울 수 있게 노트와 학교에서 받은 유인물 갖고 오세요.” 들떴던 아이들은 방학 숙제라는 말에 어깨가 축 늘어졌지만, 피할 수 없었다. 유인물에는 일기, 독서 기록, 운동하기 등 방학 동안 꼭 해야 할 필수 목록이 적혀 있었다. 그 아래는 가족과 여행, 문화 체험, 영화 관람과 같은 선택 목록도 있었다. 우선 학년이 높은 아이들과 함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필수 목록에 있는 일기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나는, 주 3회 일기를 쓰자고 말했다.

 “집에서 하는 일이 매일 똑같아서 3번을 쓰는 건 힘들어요.”라고 말했다. 핑계였지만, 답변에 일리가 있었다. 나 또한 어린 시절 비슷한 일상을 일기에 담아내느라 고생했기에 아이의 답변에 충분히 공감했다. 그래서 센터에서는 방학 전 아이들이 원하는 다양한 문화 체험을 일주일에 1회 이상 계획해 둔다. 핑계를 더 이상 댈 수 없게 된 아이들은 주 3회 일기를 써야 했다. 이후 자신의 일과에 맞게 방학 숙제할 시간과 요일, 방과 후 활동을 가는 요일 등 노트에 꼼꼼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8시~9시 30분   일어나서 씻고 밥 먹기

 9시 30분~11시  휴식하기 (친구와 게임하기, 유튜브 보기), 센터 갈 준비하기

 11시~19시      센터에서 활동하기 (방학 숙제, 선생님들과 공부, 문화 체험 등)

 19시~23시      태권도 갔다가 집에 가기, 자유 시간 등

 23시~          취침 






사실 계획을 세우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아이들마다 계획은 모두 달랐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본 적 없었다. 특히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움직였기 때문에 자신에게 맞는 계획을 세우는 것을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짧게는 20분, 길게는 30분 이상 이야기를 나눴다. 어릴수록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쉽지 않은 이 과정을 함께 고민하며 계획표를 세웠다. 그리고 2주 지나서 실행 여부를 확인했다. 자신이 계획한 요일에 일기와 독서기록을 썼는지, 계획을 수정하지 않아도 되는지 등등 꼼꼼하게 점검했다. 적어도 이 과정을 3년 이상 꾸준하게 해야 아이들이 감을 잡았다. 가족끼리 여행을 가거나, 명절 때 집을 비우는 시간이 길어질 때는 계획을 변경해야 한다고 스스로 말했다. 오랜 시간 방학 계획을 세우는 연습을 한 아이들은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의 일정을 예측하고 계획을 세우게 된다. 대부분 일상이 비슷하기에 어렵지 않은 일이다. 자신의 일정을 확인하고 방학 숙제도 계획하기 된 아이들은 더는 내게 묻지 않고 알아서 척척 해냈다. 


방학 기간 내내 자신의 시간을 계획적으로 보낸 아이들은 개학식 날 담임 선생님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담임 선생님이 방학 숙제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어요.” 

 “저처럼 방학 숙제를 잘해 간 아이들이 거의 없었어요.” 


물론 모든 아이들이 계획을 잘 세운 건 아니다. 시간이 더 많이 걸린 아이도 있었고, 아주 빠르게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아이도 있었다. 비록 고되고 힘든 과정이지만, 성장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잘 견뎌낸 내가 대견했고, 앞으로 나아갈 동력이 됐다. 초등학교 때부터 꾸준한 훈련을 통해 자신의 하루를 계획하게 되면, 중학교 진학해서는 시간을 관리하고,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습관이 빛을 발하게 된다. 학교 분위기, 공부하는 방식 등 교육 환경이 크게 바뀐다. 바뀐 환경에 맞게 자신의 일정을 잘 녹여내면서 자리 잡을 수 있을 때까지, 아이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지속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결국 이 모든 건 아이가 만들어 갈 길이기 때문에, 어른은 옆에서 시간 관리가 잘 되고 있는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다면 어떻게 수정하면 좋을지 이야기를 나누면 된다. 그리고 시간이 오래 걸려도 포기하지 않는 인내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어른의 시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 절대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오래 전 강의를 나갔다가 학과 사무실에서 이런 말을 우연히 들었다.

“요즘도 부모님들이 시간표를 대신 짜 주나 봐요. 시간표 어떻게 짜면 좋겠냐고 어떤 엄마가 전화를 했어요.”

적어도 나와 함께 한 아이들은 이런 어른으로 성장하지 않으리라 희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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