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학교에서 저만 한글을 못 읽잖아요.
처음에는 상관없었는데, 요즘은 친구들이 놀려요.
진화의 말에 가슴이 저렸다. 언제나 생글생글 웃고, 활기찼던 진화는 학교생활을 하면 할수록 표정이 어두워지고, 어깨가 축 늘어졌다. 배려할 줄 알고 따뜻한 아이였는데, 어느새 웃음을 잃어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한글이었다. 옛날과 다르게 요즘 아이들은 대부분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한글을 읽고, 쓸 줄 안다. 그러나 진화는 한글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채 입학했다. 1학기는 그럭저럭 지나갔지만, 2학기는 상황이 달랐다. 교과서에 글이 많아졌고, 담임 선생님 전달사항도 부쩍 늘어났다. 한글을 모르는 진화는 이 변화를 받아들이기 벅찼던 것이다. 진화는 한글 공부가 시급했다.
8년을 살면서 공부란 걸 해 본 적 없던 진화는 책상에 앉는 것부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엉덩이가 무거워서 한 번 앉으면 흔들림 없이 오래 앉아 있었다. 그리고 진화는 글을 읽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었다. 덕분에 시작이 좋았다. 그러나 진화가 고작 8살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진화는 집중시간이 짧고 당장 성과가 나오지 않으니 금방 지쳐서 포기하려 했다. 종종 눈물도 흘리고 힘들다고 화를 냈다. 어르고 달래며 겨우겨우 이어가던 어느 날, 교실에서 홀로 공부하던 진화의 뒷모습을 보고 위험을 느꼈다. “진화야, 힘들지?” 힘겹게 버티던 진화는 내 목소리를 듣고 그대로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리고 울면서 말했다.
“안 외워져요. 분명 외웠는데 자꾸 까먹어요.” 측은한 마음에 옆에 앉아서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진화야, 요즘 머리 쥐 나게 공부하고 있지? 선생님이 알고, 센터 다니는 언니, 오빠들도 다 알아. 그런데 진화가 이걸 알았으면 좋겠어. 진화는 다른 친구들과 출발선이 달라. 친구들은 이미 한글을 배우고 입학했고, 진화는 그렇지 못하다 보니 친구들보다 몇 배의 노력이 더 필요해. 이해하니?”
진화는 엎드린 채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쉴 새 없이 들썩이는 진화 등을 토닥이며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진화야, 나중에 한글을 잘 읽게 될 널 생각하면 벌써 기대가 된다. 엄청 힘든데도 넌 매일 책상에 앉잖아? 포기하지 않고 매일 공부하는 네가 대단한 거야. 결과가 당장 나오지 않더라도 덜 좌절하고 힘내면 좋겠어.”
8살밖에 되지 않은 진화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생각했지만, 고맙게도 진화는 힘을 내고 앞으로 나아갔다. 언제나 응원과 격려가 통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보여준 알림장을 적어 오지 않아서 학교를 다시 간 날도 있었고, 저녁 늦게까지 남아서 못다 한 숙제를 하고 간 날도 비일비재했다. 전쟁 같은 시간이 6개월쯤 지났을까? 진화는 책을 드문드문 읽기 시작했고 알림장도 곧잘 써왔다. ‘이제 숨통을 트나’ 싶었는데 다른 관문이 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6개월 동안 열심히 한글을 공부하는 동안, 학교 진도는 이어졌고, 공부는 더 깊어졌다. 길어진 지문과 어려운 단어가 많아지면서 지수는 더 큰 산을 넘어야 했다. 고심 끝에 욕심을 내려놓고 진화의 발걸음에 맞춰 천천히 나아가기로 했다. 학교에서 좌절을 계속 경험하게 될 진화의 마음을 살피면서 말이다.
진화 모습에서 어릴 때 내 모습이 자주 스쳤다. 한글을 모르고 학교에 들어갔던 나는, 받아쓰기 시험을 보면 고작 10점, 20점이었다. 덕분에 엄마는 학교에 자주 불려 갔다. 칭찬보다는 혼나는 일이 많았던 학교생활은 내내 이어졌다, 공부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잘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겨우겨우 공부했다. 모래 위에 쌓은 모래성 같은 실력을 가졌던 나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위태로운 초등학교 생활을 보내고,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 더 바닥을 쳤기에 대학입시에 실패는 당연했다. 엄마는 창피해서 집 밖을 나갈 수 없다고 나를 원망했고, 동생들 보기에도 창피했다. 인생에 낙오자가 된 기분으로 딱 죽고 싶었을 때, 유일하게 용기를 준 사람은 고3 때 담임 선생님이었다.
"대학에 떨어졌다고 인생 끝난 거 아냐. 지금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 앞으로 살면서 컴퓨터와 외국어는 꼭 필요할 거야. 학원 다니면서 공부해 “ 선생님 말씀이라도 따라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컴퓨터와 일본어를 공부하기 위해 학원을 다녔다. 취직도 하고, 친구들보다 4년 늦게 대학(일본어 전공) 진학에 성공했다. 늦게 시작한 만큼 간절함이 컸다. 학교를 다니는 내내 장학금을 받았고, 전공을 살려 관광가이드 자격증도 취득했다. 새로운 일을 시작했지만, 만만치 않은 현실에 불안이 엄습할 때마다 가까운 선배가 나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난 너한테 연락이 오면 꽤 기대가 되더라, 얘가 이번에는 무슨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전화했을까? 얼마나 성장해 있을까? 하고 말이야.” 참, 가슴 벅찬 말이었다. 오랜 시간 마음 한쪽에 묻어두고 사는 말이다. 어쩌면 내 삶의 원동력이었던 이 분들이 없었다면 인생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인생의 고비는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그 순간에 어떤 사람과 마주하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에 따라 힘을 받기도 하고, 깊은 좌절에 빠지기도 한다. 힘든 순간마다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도와준 사람들이 참 많았다. 덕분에 나는 스스로를 가치 있게 생각했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이런 힘을 부모에게 받으면 가장 바람직하다. 오로지 공부, 성적, 돈 많이 버는 직업에만 몰입해서 내 아이가 꺼져가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보면 좋겠다. 그리고 내 아이에게 나는 어떤 어른인지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갖길 권한다.
“난 네가 앞으로 어떻게 클지 너무 궁금해. 너는 커서 뭐가 될까? 앞으로 펼쳐질 너의 인생이 궁금하고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