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과 아이는 엄연히 다르다
요즘 부모님들은 핸드폰 때문에 아이와 다툰 경험이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아마도 셀 수 없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아이들과 만나면서 이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지역아동센터에 근무하면서 핸드폰으로 인한 갈등은 가장 큰 난제였다. 수업 중에도 연신 울리는 알림음, 차가 오는지 아랑곳 하지 않고 핸드폰만 쳐다보며 걷는 경우도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핸드폰을 사용하는 아이들과 싸워야했다. 안전을 위해서라도 분명 변화가 필요했다.
가장 공식적인 자리이면서 아이들과 사회복지사들의 의견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자치회의를 이용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핸드폰을 사용해서 수업에도 방해가 되고, 안전사고에 대한 위험도 있으니 적당한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어.” 내 이야기에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평소에 지나치다고 생각했던 아이들도 있었고, 무슨 상관인데? 하며 상관하지 말라고 하는 아이들도 있어서 의견이 분분했다. 안건이 나왔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결과가 나와야했다. 생각이 어떠냐고 물었지만, 아이들은 침묵했다. 그때 찬이가 말했다.
“우리 보고 핸드폰 하지 말라고 하면서 선생님은 핸드폰 하잖아요!
선생님들은 마음대로 해도 되고, 우리는 안 되고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에요?”
팔짱을 끼고 따지듯 말하는 태도, 비꼬는 듯한 말투,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솔직한 심정은 나도 똑같이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동요되면 대화가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속으로 ‘침착해’를 수없이 외치며 말했다.
“맞아, 나는 너희들하고 있을 때 핸드폰을 써.
그런데 내가 너랑 같니?”
아이들 시선이 찬이에게 쏠렸다. 어른들마저도 꼼짝 못할 만큼 센터에서 영향력이 꽤나 큰 찬이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찬이 말대로 나는 아이들과 있을 때 핸드폰을 사용한다. 업무 특성상 아이들 활동사진과 동영상을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센터로 오는 전화가 많기 때문에 항상 핸드폰을 갖고 있었다. 어른이 모범을 보여야 하는 건 맞지만, 어른과 아이 역할이 분명 다르므로 아이들에게 굳이 이해를 구하지 않았다. 찬이가 이점을 불만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찬이는 학생으로 공부하고 놀아야 할 책임과 의무 그리고 권리가 있지? 나도 센터장으로 너희들을 안전하게 돌봐야하는 건 물론이고, 센터를 잘 운영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어. 너와 내가 할 일이 분명하게 다른데, 불공평하다고 말하면 찬이가 나대신 일하겠단 뜻인가?”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태도는 단호했다 (사실 목소리에 화가 전혀 없었다고 장담은 못한다). 내 말을 인정하는 눈빛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반박을 하지 못한 찬이는 침묵했다. 찬이를 따르던 아이들도 고요했다. 기껏해야 초등학교 4학년 아이였다. 어린 아이 태도에 어른이 흔들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자치회의를 통해 핸드폰은 수업 중에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이 났다. 반강제일 수 있지만,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때로는 강제도 필요하기 때문에 가차 없이 진행했다. 다음 날부터 센터에 오면 스마트폰을 사물함에 넣었다. 물론 사용시간을 따로 정해져있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핸드폰으로 인한 갈들은 줄어들었다. 핸드폰 사용을 무조건 막은 것은 아니다. 필요할 때 사용하고, 다 쓰면 내려놓는 연습을 했다. 물론 쉬운 건 아니다. 한번 손에 쥔 핸드폰을 내려놓기란 쉽지 않지만, 연습하면 해낼 수 있다.
사실 지금 풀어낸 이야기는 핸드폰이 중심에 있는 것 같지만, 어른과 아이 역할이 다르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고 감정을 읽어줘야 한다는 흐름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어른들은 점점 지도력을 잃어가고 있다.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해도 감정을 읽어주기에 급급하다. 한술 더 떠서 친구 같은 부모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친구와 있으면 동질감을 느낄 수 있지만, 세상을 나아가는데 친구가 길잡이 역할을 해 주지 못한다. 친구 같은 부모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백 번 양보해서 부모 자식사이가 친구 같은 관계가 됐다고 하자!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수많은 선택과 어려움에 처한다. 그럴 때 친구를 찾기보다 믿고 따를만한 어른을 찾아가기 마련이다. 친구 같은 부모가 과연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혹시 그런 역할을 하는 부모님이 있다면 관계를 명확하게 인정하고 행동한다고 볼 수 있다.
“감정은 읽어주지만, 행동은 통제하라” 오래전부터 전문가들은 말했지만, 감정만 읽어주고, 행동을 통제하지 않는 부모가 많아지고 있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느낀 많은 전문가들이 다양한 채널에서 더 자주 강조하고 있다. 어른과 아이는 동등하지 않다. 아이에게 어른 말을 무조건 따르라고 강압적으로 행동하라는 것이 아니다. 먼저 권위 있는 어른이 되길 바란다. “요즘 애들 잘못 건들면 오히려 큰일 난다”, “사춘기 애들 건드려봤자 어른들이 다친다.”는 말과 생각들이 견고해지면서 아이들이 나쁜 행동을 하게끔 오히려 부축이고 있다. 그 결과가 학교현장에서 선생님들이 죽음으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아주 오래 전, 중학교 1학년 여자아이와 일주일에 1번, 1시간씩 만나는 멘토링 활동을 한 경험이 있다. 아이는 3개월 동안 나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난 포기하지 않았다. 오늘 학교에서 뭐했는지, 밥은 뭘 먹었는지 등 한, 두 마디씩 말을 건넸다. 시큰둥한 아이 반응을 보며 괴로웠지만, 그럴수록 더 말을 시켰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나고 나니 아이가 처음으로 나에게 말을 건넸다. “선생님은 내가 이렇게 말을 안 하는데 끝까지 말하네요.”, “언젠가 내 마음을 알아줄 거라 믿었거든. 이런 날이 오네.” 아이들은 자신과 마주한 어른을 믿어도 될지, 넘어서도 될지 끊임없이 시험한다. 아이가 어른을 시험한다는 건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도 자신을 끝까지 붙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른은 반드시 그 시험에 통과해야 한다. 이때 어른에게 필요한 건 바로 단단한 지도력(리더십)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다. 아이가 아무리 흔들어도 끄떡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아이들은 생각한다. ‘믿어도 되겠는데?’하고 말이다.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왜 어른들은 자꾸 나보고 선택하라고 해요?” 답답해하는 아이를 향해 어떤 어른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나도 헷갈리고 모르는 것투성인데, 두렵거든요. 어른들이 도와주면 좋겠어요. 무조건 나보고 선택하라고 말하지 말고, 믿을만한 어른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세상은 자꾸 변한다. 지금은 공감으로 끝나면 안 되는 시대가 됐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세상과 마주한 아이들은 세상이 무섭고 두렵다. 믿고 따를만한 어른, 지도력을 갖춘 어른을 원한다. 아이의 감정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에 멈추지 말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라고 단호하게 말하면서 잘못된 걸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 어른도 잘못된 행동을 했다면 “잘못했다.” 인정하고 고쳐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엄마, 아빠도 사과하지 않으면서 왜 나보고 하래요?”라는 말을 듣기 싫다면 말이다. 분명히 역할이 다르지만, 잘못된 행동을 한다면 인정하고 사과하는 건 어른이 본보여야 할 모습이라는 것 또한 명심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