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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플슈룹 Oct 14. 2024

질문하지 않는 사회

선생님, 코로나가 뭐예요?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패닉에 빠져있을 때, 나 또한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시와 구청에서 공문이 쏟아져내려 오고 지침이 수시로 바뀌었다. 어느 날 아이들과 있으려면 백신 주사를 맞아야 한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하루가 멀다고 뉴스에서 백신주사 맞고 죽은 사람들의 인원수가 보도되고 있었다. 백신 주사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던 때,  ‘주사를 맞으라고? 나도 죽으면 어쩌지? 일을 그만둬야 하나?’ 불안에 떨고 있던 그때 내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일이 생겼다. 1학년 선주가 나에게 질문했다.


"선생님, 코로나가 뭐예요?

궁금해서 물어봐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요."


‘아차!’ 싶었다. 나만의 불안에 빠져 아이들의 마음을 놓치고 있었다. 뉴스를 봐도 무슨 말일지 모를 테고, 어른들은 이래라 저래라만 하고 있으니 아이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무서웠을까? 내가 정신을 차려야 했다. 선주에게 하루만 시간을 달라고 말하고, 뉴스를 뒤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만한 내용의 뉴스를 찾는데, 쉽지 않았다. 정부 기관 이름도 많이 나오고, 생소한 단어들이 총집합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오랜 고민 끝에 뉴스 내용이 너무 길지 않은 것으로 골랐다. 어려운 용어는 내가 쉽게 풀어서 정리했고, 뉴스를 거의 외울 정도로 봤다. 준비를 마친 다음 날 오후,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자, 지금부터 코로나19 관련뉴스를 함께 볼 거야. 내용이 어려울 수 있으니, 집중해서 잘 봐줘. 자세한 설명은 뉴스가 끝나고 이야기할게.” 뉴스를 연속으로 2번 시청했다. 그리고 앵커의 말을 한 문장씩 끊어서 듣고 내용을 설명했다. 아이들은 어느 때보다 집중하고 있었다. 2분 정도 되는 뉴스 내용을 설명한 후 2번을 더 봤다. 아이들 눈빛이 조금씩 변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정확하게 다 알 수 없었겠지만, 뭔가 이해한 눈빛이었다. 모든 설명을 끝내고, 어땠는지 물었다. 이제 좀 알 것 같다며 한결 가벼워진 표정이었다. “그동안 많이 답답했지?”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아이들의 푸념이 쏟아졌다. 학교에 너무 가고 싶은데 어른들이 가지 말라고 해서 답답했고, 마스크는 답답한데, 왜 하는지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 몰래몰래 벗었다고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 코로나19가 뭔지 궁금해죽겠는데, 아무도 답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답답했지만 결국 포기했다고 말하는 아이를 보면서, 두려움에 휩싸여 나 혼자만 살 궁리 한 것 같아 미안했다. 


혹시 집에서 어른들과 코로나19 관련 뉴스를 보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냐고 물었다. 대부분 경험이 없었고, 그나마 질문을 한 아이도 있었지만 '알아서 뭐 해! 그냥 엄마, 아빠가 시키는 대로만 해'라는 답변을 받아서 속상한 기분만 기억하는 아이도 있었다. 부모의 마음도, 아이의 마음도 모두 이해되는 상황이었다. “어떤 어른도 코로나19를 만나본 사람이 없어. 뭘 알아야 설명하는데, 아는 게 없어서 너희들까지 크게 신경 쓰지 못했어. 이점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뉴스에서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죽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는데, 나도 죽을까 봐 걱정됐거든. 어른들도 혼란이었는데, 너희들은 더 했겠지. 미안하고 이해를 부탁할게.” 나는 아이들에게 진심을 담아 마음을 전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조금 주춤해지면서 사회적 거리 두기도 완화되던 어느 해, EBS 다큐프라임에서 코로나19 교육보고서를 시리즈로 방영한 적이 있었다. 코로나시대를 살았던 아이들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지냈던 아이들은 사실, 어른보다 더 불안한 시간을 보냈다. 불안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세한 설명을 해 주지 않았고, 물어봐도 명확한 답변이 없어서 힘들고 무서웠다는 인터뷰 장면이 가장 기억에 오래 남는다.


아이들은 세상에 대해 궁금하고, 알고 싶은 게 참 많다. 아이 옆에 있는 어른밖에 없는데 어른은 아이들에게 불친절하다. 불친절한데 말도 예쁘지 않다. 오히려 ‘뭐 그렇게 궁금한 게 많냐?, 그냥 하라는 대로 해’라며 타박을 받거나, 외면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성장하면서 궁금한 것을 묻고 답변하는 과정에서 질타를 받고 자란 아이들은 어떤 어른으로 성장할까? 부모님 바라는 것처럼, 자아존중감 높고 자기 일을 잘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그 결과가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고 있다. 과거 오바마 대통령이 연설하는 자리에서 질문하지 않는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할 기회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누구도 말하지 못했던 영상은 아주 유명하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한국 기자들을 탓할 수 없다. 아마 한국사람 어떤 누구든 그 자리에서 자유롭게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질문을 두려워하는 건 우리 안에 뿌리 박혀 있다. 학교에서 강의할 때 일이다. 수업시간이 끝나기 직전, 질문이 있다며 손을 든 학생이 있었다. 학생이 손만 들었는데,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한숨 소리와 함께, ‘질문은 쉬는 시간에 혼자 가서 하지. 왜 수업시간에 하고 난리야.’라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질문하겠다는 학생도, 나도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질문하겠다고 용기 낸 학생이 기특하고 예뻐서 난 질문을 받아줬다. 그리고 바쁜 사람들은 가도록 했다. 그렇게 했더니 편안한 분위기에서 오히려 이야기가 잘 됐던 경험을 했다. 


질문하지 않는 사회,

존중하지 않는 문화.


‘나도 어릴 때 다 그렇게 컸어!’라고 치부하기엔 세상이 많이 변했다. 어른들이 입버릇처럼 말한다. “내 아이는 나처럼 자라면 안 돼” 말 하지만 행동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내 아이가 할 말도 못 하고 우물쭈물하면서 남들이 하라는 대로 살길 바라는 건 절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아이를 대하는 자세와 생각의 전환이다. 단순히 아이를 가르쳐야 하는 존재, 말해줘도 잘 모르니까 그냥 넘어가도 되는 그런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면 잠시 접어뒀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알 권리가 있고, 어른은 설명해 줘야 할 책임이 있다. 물론 친절한 어른도 많다는 걸 알지만, 그 비율이 매우 적다는 점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이니까 그럴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변하면 된다. 내가 하고 있는 말과 행동이 내 아이를 질문하지 않는 어른으로 키우고 있는 건 아닌지 점검했으면 좋겠다.


혹시 오해를 할까 걱정이 돼서 말을 덧붙인다. 아이들 말을 무조건 듣고, 전부 응답해 주라는 건 아니다. 때와 장소,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답을 바로 해 줄 수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는 점을 아이에게 전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건 어른의 태도다. 전달하는 어른의 말과 행동은 친절하고 명확해야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기다릴 수 있다. 물론 모든 아이들이 말처럼 쉽게 기다리지 않는다. 오랫동안 연습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한다. 부디 아이들에게 친절한 어른으로 남아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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