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할 수 있게 기다리기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지역아동센터에 온다. 센터에 오면 가장 먼저 학교 숙제를 한다. 숙제가 끝나면 센터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예를 들어 음악, 미술, 체육, 영어, 수학 등)에 참여한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아이들은 심심하다. 그날도 그랬다. 할 일을 마친 6학년 삼총사, 태수와 훈이, 용준이가 나를 찾아왔다.
“저희 숙제 다 하고, 활동도 끝났는데 센터 앞에서 축구공 가지고 놀다 와도 돼요?”
센터 앞에 좁은 골목길이 있다. 그 길은 어른 3명이 겨우 걸을까 말까 할 만큼 좁다. 그런 곳에서 공놀이라고?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대안을 고민하고 있었다. 내 대답이 늦자 삼총사는 나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선생님 조금만 놀다 올게요.” 내가 낸 대안은 “내일 공원 가서 놀자”였다. 아이들은 뜻을 굽히지 않았고, 내 옆에서 온갖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설득시키려고 애쓰는 모습이 귀여워서 피식 웃었다. 이때를 놓칠세라, 아이들은 더 매달렸다. “진짜 조심히 놀게요. 축구는 안 하고 공만 살살 주고받으면서 놀게요. 진짜 저희 못 믿으세요?”
물론 못 믿지. 믿지 않았지만, 금방 따라 나갈 생각에 조심히 놀라고 주의를 준 후 내보냈다. 나간 지 5분쯤 지났을까?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용준이가 급히 뛰어 들어왔다. 공을 차고 놀다가 앞집으로 공이 넘어갔는데, 할머니가 공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아.. 우려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한달음에 뛰어나갔다. 세상을 다 잃은 사람들 마냥 자리에 앉아서 앞집 대문만 쳐다보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내가 대문 앞에 섰다.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용기 내어 말했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댁 앞에 있는 지역아동센터에서 왔습니다. 저희 아이들이 축구하다가 공을 넘겼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공을 좀 받아올 수 있을까요?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무 대답이 없어서 한 번 더 말하려던 순간, 담장 밖으로 할머니 욕이 따발총처럼 날아들었다. 난생처음 들어본 욕이 정신없이 귀에 꽂히는 데,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내 모습을 본 아이들이 더 놀란 듯 뒤로 도망쳤다. “이게 몇 번째야! 절대 공 안 줘.”라는 말만 남긴 채 할머니 얼굴은 구경도 못했다. 욕만 잔뜩 먹고, 결국 공은 돌려받지 못했다.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아이들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해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계속 났다. ‘공 한번 넘겼다고 이토록 욕을 먹을 일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평소에도 할머니가 욕을 하는지 아이들에게 물었다.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요, 저희가 옛날부터 공을 자주 넘겼어요. 그동안 공을 넘겼어도 미안하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이런 일이 너무 자주 생기니까 어느 날부터 할머니가 센터를 싫어하게 된 것 같아요. 할머니가 화날만하죠.” 그리고 지금까지 어른들이 사과한 모습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란 말을 덧붙였다. 그랬구나. 이해가 됐지만, 억울해 죽을 것 같은 내 마음은 누구에게 보상받을 수 있을까? 이미 일은 벌어졌고,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이었다. 아이들을 먼저 들여보내고,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삼총사는 마음이 불편했는지 나를 살피느라 센터 문을 열고 기웃거리느라 바빴다. 아이들과 마주할 준비가 된 나는 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내 앞으로 달려온 삼총사는 죄인이었다. 이미 모든 아이들에게 상황 공유는 끝났고, 다른 아이들도 숨죽이며 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밖에서 있었던 일 들어서 알고 있지? 내가 이번 일로 깨달은 게 많아. 혹시 내가 평소에 자주 했던 말 기억하니?”
“우리가 무책임한 행동을 하면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대신 책임을 질 수 있다고 하셨어요.”
맞다. 이 말은 내가 아이들에게 자주 했던 말 중 하나였다. 평소 아이들 행동은 불손했다. 어른에게 함부로 행동했고, 친구 한 명을 정해서 놀리고 무시했다. 한 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교육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런데 이번 일이 수백 번의 말보다 제대로 된 본보기가 된 것 같아 감사했다. 비록 내가 욕을 많이 먹었지만, 아이들이 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책임지고 조심히 놀겠다고 큰소리쳤던 태수, 훈이, 용준이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그래서 일이 이렇게 됐지. 너희들이 무책임한 행동을 해서 내가 그 책임을 지게 된 거야. 이해되니?”
삼총사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했는데도, 막상 아이들을 보니 화가 슬금슬금 기어올랐다. 하지만 이번 일을 잔소리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깨달음이 있는 계기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난 말을 아꼈다. 저학년이었다면 이런 방법을 택하지 않았을 텐데, 곧 중학교 진학을 앞둔 남자아이들이라 선택한 방법이다. 이미 충분히 잘못을 뉘우치며 반성하고 있었다. 다만 이번 일로 아이들이 충분히 깨닫고 실천하길 바라는 마음에 한마디를 건넸다. “너희들이 무심코 한 말과 행동 때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상처받고 다칠 수 있다는 걸 잊지 않길 바란다.” 숨죽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을 안아주며 상황은 일단락 됐다. 이번 일은 센터에서 한동안 전설처럼 이어졌다. 다행히 아이들은 행동에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고맙게도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면 안 되는 사실은 아이들이 남의 집에 공을 그렇게 넘겼어도 진심 어린 사과가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제대로 된 훈육이 빠졌기에 일이 이 지경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어른들은 훈육이 필요한 상황에서 ‘아직 애가 어려서 그래, 몰라서 그런 거니까 그냥 넘어가’라고 치부할 때가 종종 있다. 틀린 말이다. 어려서부터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점을 분명히 제시하고 실천할 수 있게 어른이 도와야 한다. ‘놀다 보면 그럴 수 있지’가 아니라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을 지키고 끝까지 책임지는 훈련을 어릴 때부터 한다면 아이들의 행동은 보다 더 신중해질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 아이가 사람들과 조화롭게 어울리며, 책임감 있고 성실한 어른으로 성장하길 바란다면, 지금부터 인내심을 갖고 책임지고 가르치는 어른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