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지치기 전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게된 이유

by 순례자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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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만의 휴식


31살의 나는 마음이 너무 지쳐버렸다. 마치 내 인생이 정오의 햇빛이 아닌 주황빛의 노을처럼 느껴졌다.


성인이 된 이후 한 달 이상을 쉬어본 적이 없었다. 20살에 대학이 아닌 공장에 들어갔었고, 그곳에서 본 현실에 여름부터 수능을 준비해 다음 해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과 아르바이트는 언제나 세트상품이었다. '나의' 용돈벌이가 아니라 '우리'집안의 생계를 위함이었다. 뒤늦게 입대하여 2년의 군생활을 마치는 말년휴가에서도 14일 중 9일을 노가다에 나갔을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남들처럼 취업준비를 하고, 운 좋게 취업한 이후에도 당장의 생계에 허덕이며 나아지지 않았다.


약 2년 정도 남들처럼 직장생활을 했다. 대학생의 아르바이트가 아닌 , 직장인이 되어 사회인이 되면 내게 주어진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리라 생각했었다. 수입도 늘고 나에게 집중할 시간도 생기니 내가 짊어진 짐이 조금씩 가벼워질 것이라 생각했었다. 과연 그랫을까?


마치 꾀부린 당나귀처럼 어깨 위의 무게는 결코 가벼워질 줄 몰랐다. 시나브로 물에 젖어가듯이 조금씩 조금씩 무게가 더해지고 있었다. 미처 알지 못했었던 세상 돌아가는 법이었다. 내가 어른이 되어가듯 아버지도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다.


29살이 되었다. 내가 처한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니던 회사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이것을 인정하고 깨닫기까지 나는 2년이 걸렸다. '이런 식으로는 점점 침식되어갈 거야.' 더 큰 가능성으로 도전을 하고자 캐나다로 향하였다. 1년이 조금 넘는 외국생활, 이곳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 내게 주어지는 기회들. 내 주변을 바라보았을 때, 참 얻은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잘 살아왔다고 위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안에 내가 없었다. 가족들을 위해 너무 열심히 산 나머지 스스로에게 엄격해지고 나 자신을 정리할 틈이 없었다. 갑자기 나의 20대에 대한 아주 커다란 아쉬움이 찾아왔다.

일한 것 말고 나의 20대에 무엇이 있었지?


너무나 서글프게 다가오는 나의 20대.

그래서 10년 만에 나에게 잠시 휴가를 주기로 했다.


* 스페인 하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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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심란한 어느 날, 여행프로를 찾아보았다. 일종의 대리만족이었다. 꽃보다 청춘이나 트래블러 같은 여행프로를 보며 나에겐 없는 여유를 그들에게서 찾곤 하였다. 우연히 발견한 스페인 하숙, '한달살이 이야기인가? 요즘 외국에서 한 달 사는 게 유행이라던데 하숙집에서 사나?' 하는 마음이었다. 그 포스터에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 차승원이 모델의 존재감을 뽐내며 등장하기에 방송을 찾아봤다. 그렇게 알게 된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 방송을 보고 4개월 뒤 나는 스페인 그 땅 위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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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비하기


네이버와 구글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검색해보았다. 필요한 준비물들을 검색해보니 옷과 배낭, 등산화 외에는 다른 한국인들처럼 준비하기 쉽지 않았다. 특히나 간편 식료품들.. 비빔 고추장, 라면스프, 어묵 티백과 같은... 사실 있어도 비싸서 고민했을법한 준비물들. 그러나 별로 중요한 것들이 아니었다. 지금껏 살아온 삶에서 준비가 제대로 갖춰진 채 시작한 적이 있던가? 늘 그래 왔었다.

순례길에 대한 물질적 준비가 아닌 잠시 가질 휴식에 대해 준비하였다.


사실 생각해보면 준비라 할 것도 없었다. 여행을 결심한 시기는 5월 초반, 먼저 살고 있는 집의 랜드로드에게 렌트 종료를 통지하고 직장에 잠시 여행을 떠나겠다며 작별을 고하고 출국일 2일 전에야 파리행 티켓팅을 했다. 결국 내가 한 가장 큰 준비는 집 렌트의 종료와 직장에 통보하기였다.


그 외에는 스페인 하숙 방송을 보며 어떤 곳이구나, 어떤 사람들이 오는 곳이구나 하는 마음의 준비였다.





* 당일


한국에서의 10년의 지난 시간들, 해외에 야심 차게 도전하러 나와 두 달 만에 교통사고를 당해 한 달간 누워있고 준비되지 않은 해외생활과 비자 문제 등의 시간들로 마음이 많이 상해있었다. 이 시기에 가장 큰 변화는 하루 중, 잠자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게 느껴졌다. 막상 출발 당일이 다가와도 기쁘다기보다 또 다른 임무를 하러 가는 기분이었다. 마치 하루의 정해진 일과를 하나씩 해 나가듯이 의무적이고 기계적으로.


쉴 줄 모르는 바보였었다.



* 프랑스 파리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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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었다 가자.

출국 당일까지도 재차 다짐했다. 나는 지금 쉬러 가는 거야, 머릿속에 모든 생각을 비우러 가는 거야.

공항에서 도착할 당일의 한인민박을 예약하고 당분간 아무 생각하지 않기로 또다시 다짐했다. 평소에 좋아하던 데로 사진도 찍고, 늦잠도 자고, 무엇에도 쫓기지 말고 잠시 쉬었다 가자 생각했다. 얼마가 될지 모르겠지만 조금 멍청해진 다음에 순례길을 걸어보자, 이 다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조금 멍청해지자


늦잠 자고 일어나 브런치를 먹고, 도시를 좀 걸어 다니다 카페에서 커피 한잔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고 또 도시 사진 찍고. 관광객이 아닌 마치 원래 살던 사람처럼 지냈다. 에코백 하나메고, 슬리퍼나 샌들 신고 자유롭고 편하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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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 되어가자 한량이 생활에 무료함이 찾아왔다. 역시 천상 노예근성이 내 안에 스며든 것인가 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야간 버스로 순례길의 시작점, 바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밤 야간 버스를 예약하고 숙소에서 짐 챙겨 버스터미널로 향한다. 혼자만의 즉흥적인 여행, 내가 가고 싶을 때 가면 된다.


나는 순례자가 되고 싶다.

성경은 모르지만 나 자신에 대한 순례를 시작하고자 한다.

무거운 내 마음을 달래주고 너무 지쳐버린 나에게 조금 휴식을 허락하고 싶어서


나는 순례자가 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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