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친절로 금광을 캐다
IMF로 중복되는 은행 지점들의 통폐합이 이루어졌다. 통폐합의 우선 조건은 자가 건물로 이전하는 것이어서 우리 지점은 서울에서 가장 비싼 명동 한복판으로 이전했다. 지점은 개인영업점과 기업영업점으로 나누어졌고 당좌 업무를 맡고 있던 나는 기업영업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기업들의 자금 현황을 확인하며 업무 마감을 진행하고 있었다. 입금된 수표들을 어음교환반으로 넘기고 본점에 지출하려는 순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우리 지점 고객은 아니었지만 다급한 목소리로 수표 입금을 부탁했다. 그는 S 증권사 직원으로 여의도에 있는 거래 은행까지 가려면 이동시간 때문에 업무 마감이 늦어져 어려움이 발생한다는 사정을 이야기하며 입금 처리를 요청했다. 주변의 여러 지점에 전화했지만 업무 종료를 이유로 모두 거절한 상태라고 말했다. 나는 지금 있는 곳과 지점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확인하고 가능한 빠르게 이동하라고 했다. 우리 지점은 본점과 가까이 있어 지금까지 받은 수표를 먼저 본점으로 보내고 추가로 다시 지출하기로 했다. S 증권사 직원은 뛰어왔는지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미안한 마음이 가득한 얼굴로 달려온 그에게 나는 수표를 받고 직원에게 입금하도록 넘겨준 후 물 한 잔을 건넸다. 그가 물을 마시며 한숨 돌린 후, 이 자금이 어떤 자금인지 물어보았다. 그는 양도성 예금증서(CD) 중개업무로 외국은행에 판매한 자금이라고 말하며 늦은 시간에 입금을 받아준 것에 대해서 무척 고마워했다. 감사 표시로 은행 카드 입회 신청서 10장을 달라고 했다. 당시 은행 직원들이 카드 실적에 시달리고 있음을 잘 알기에 보답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의 제안에 나도 못 이기는 척 서류를 챙겨 건네주었다.
며칠이 지난 후 그는 신용카드 입회 신청서를 들고 찾아왔다. 나는 약속을 지켜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며 양도성 예금증서(CD) 중개업무와 관련하여 우리 지점과 거래하자고 제안했다. 며칠 전 지점장님께서 외부 섭외를 다녀오신 후, H 증권사와 50억 원의 양도성 예금증서(CD)를 발행하면서 지점 실적과 수익을 올리기에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점장님께서는 본점 신탁부에 근무하신 경험이 있어 이 부분에 강점을 갖고 계셨다. 금리는 물론 늦은 시간 수표 입금을 받아줄 수 있어 그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S 증권사 직원 A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늘 1,000억 원을 발행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얼마까지 금리를 맞추면 되는지 확인하고 지점장님께 말씀드렸다. 지점장님은 신탁부와 자금부에 연락하여 금리를 맞추고 내게 연락하라고 하셨다. 나는 A에게 연락하여 당일 1,000억 원의 CD를 발행했다. 그 후 A는 CD 중개업무가 있을 때마다 가장 먼저 나에게 연락했다. 그와의 관계는 계속되었고 며칠이 지난 후 다시 1,000억 원의 CD 발행 요청이 있었다. 이번에도 재치를 발휘하여 S 증권사에서 원하는 금리 조건을 맞추었는데 갑자기 500억 원으로 금액이 줄어들었다. 원인을 살펴보니 나와 거래하는 직원과 담당 부장님 사이에서 자금을 나누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지점이 실적을 계속 올리는 것이 본점에 소문이 나서 평소 S 증권 채권 담당 부장과 친분이 있던 다른 지점장으로부터 섭외가 들어와 금액 조정이 되었다. 금리 조건에서 우리 지점이 유리했지만, 금리를 동일하게 맞추는 조건으로 금액을 나누어 발행했다. A는 내게 미안하다며 어쩔 줄 몰라했지만 나도 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기에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이후에도 A는 개별 실적이 있을 때마다 연락하여 그 해 S 증권과 4,400억 원의 실적을 거둘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CD 발행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고 남편의 도움을 받아 G 증권사 채권 담당자를 소개받았다. 대부분의 증권사가 여의도에 있었기 때문에 CD를 발행하여 가져다주는 조건으로 G 증권사에서 3,500억 원의 CD 발행 실적을 거두었다. 지점장님께서는 책임자 회의 때마다 나를 치켜세우셨다.
“OOO 대리 덕분에 지점 수신실적이 목표를 초과 달성해서 이번에는 조금 편하게 가겠는데”
지점장님께서는 실적이 좋아 본점 회의에 들어가실 때마다 싱글벙글 표정관리가 안되었다. 며칠 후, 본점 기업영업부장께서 지점을 방문하셨다. 지점 수신실적이 지난해보다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어 이에 대한 현장 보고를 받기 위해서였다. 지점장님께서 외부에 계셔서 대신 보고를 드렸다. 지점 현황과 수신 잔고 1조 원을 달성에 대한 전략과 거래처 섭외 방법 등을 말씀드렸다. 당시 지점에서는 종합금융회사 파산 자금을 관리하고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증권사를 집중 섭외하여 양도성 예금증서를 발행하면서 수신실적을 초과 달성하게 되었다고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부장님께서 증권사가 있는 여의도보다 명동 지점이 어떻게 CD 발행을 더 많이 하게 되었는지 본부에서 화제가 되었다며 칭찬하셨다. 덕분에 내 이름은 자금부와 신탁부 금리 담당자에게 각인되었고 가능한 지점에서 원하는 금리를 맞춰 주었다.
S 증권 A 직원의 사례는 채권팀의 막내임에도 불구하고 채권팀을 이끄는 부장님보다 더 실질적인 도움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가 이렇게 협력할 수 있었던 것은 실무자의 업무처리를 신속하고 편리하게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곤란한 상황에 빠졌을 때 베풀었던 작은 친절이 4,400억 원이라는 금광이 되어 돌아왔다. 이것을 계기로 명동지점 개점이래 수신 잔고 1조 원의 첫발을 내디딜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