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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법 P3: 시어머니의 색 • 시아버지의 무게

소설 • 그녀가 사는 법

by 잠시 동안

결혼 후 처음 맞는 시어머니의 생신이었다.


시아는 조용히 손글씨로 카드를 쓰고, 남편 아로와 상의해 정성껏 용돈을 봉투에 담았다.
크게 거창하진 않았지만, 마음을 담아 준비한 것이었다. ‘정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할 수 있는 만큼의 따뜻함.

시댁에 도착하니 거실 테이블엔 이미 케이터링 음식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주방과 식탁 사이를 아주머니 두 분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굳이 나설 필요는 없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시아는 막내며느리로서의 도리를 지키고 싶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시아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설거지를 하려는 마음이었다.
한쪽 선반을 열어 초록색 수세미를 꺼내 들었다. 물을 틀려던 찰나,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얘, 그만—”

동작이 멈췄다.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시아의 손에서 수세미를 내려놓은 시어머니는 선반 쪽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수세미들을 꺼냈다.

“핑크색은 유리그릇. 노란색은 일반 식기. 초록색은 조리도구. 파란색은 스푼, 포크, 나이프. 그리고 이 친환경 수세미는 명품 그릇 전용이야.”

시아는 순간 숨을 들이켰다.
설거지가 단지 그릇을 씻는 행위가 아니라, 이 집의 하우스룰이라는 이름의 통과의례처럼 느껴졌다.
수세미 하나에도 철저한 체계와 위계가 존재했고, 그 안에서 시아는 입문자로서 검증받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집은 몰라도, 우리 집은 이렇게 한단다.”
“눈에 빨리 익히거라.”

시어머니의 말끝엔 언제나 조용하지만 확실한 선이 있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시아는 말없이 주방에서 와인 한 잔을 따라 거실 소파에 앉았다.
입술에 와인을 가져가자, 알코올이 입안에서 묘한 씁쓸함으로 퍼졌다.
시아의 머릿속엔 수세미의 색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핑크, 노랑, 초록, 파랑…

단지 색깔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가 이 집안에서 맡아야 할 정해진 역할처럼 느껴졌다.
유리를 닦는 사람, 조리도구를 정리하는 사람, 칼과 포크를 분류하는 사람—
각자 자리가 있고, 혼동 없이 그 자리를 지켜야 하는 생활의 규칙. 그 질서 속에서 시아는 막내며느리로서 조심스레 발을 들이고 있었다.
그건 반항할 수 없는, 말 없는 위계였다.


시아버지는 올리브 오일을 싫어한다.


한 방울의 냄새라도 나면, 그날 집안 공기는 서늘하게 식어갔다.
마치 고요한 호수 위에 조용히 던져진 돌 하나처럼.

겉보기엔 시아버지는 점잖은 분이다.
말투 하나, 앉은 자세 하나에도 절제와 권위가 스며 있었고,
골프장이나 고급 식당에선 그 점잖음이 무게를 더했다.
마치 존경이라는 감정이 존재 이유인 듯, 그는 그 시선 속에서 살아 있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달랐다.
점잖음은 자주 깨졌고, 시어머니와의 다툼은 잦았다.
시어머니가 외출이라도 하면, 그 화살은 자연스레 며느리에게로 향했다. 시아에겐 유독 더 그랬다.
‘내조’라는 이름으로 막내며느리에게 가장 높은 기준이 드리워졌다.
조용하고 무난한 그녀보다, 말 잘하고 아부에 능한 둘째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았다.

어느 날은, 동서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시아가 호되게 혼나는 일이 있었다.
그 목소리는 크고, 단정은 일방적이었다. 그날 시아는 확실히 깨달았다.

‘여기선 내가 목소리를 낼 자리가 없다.’

그 뒤로 그녀는 물러나는 법을 배웠다.


남편 아로의 생일. 결혼 첫 해였다.
아침, 아로는 무심히 수표를 건넸다.

“아버지가 준 거야. 네 통장에 넣어둬.”

만 불. 적지 않은 돈이었다.
시아는 감사한 마음으로 저축 통장에 입금했다.
가족 간의 정이라고 여겼다.

며칠 뒤, 그 사실을 알게 된 시아버지는 단 한 마디로 그 마음을 꺾었다.

“어디다 손을 대!”

서늘한 목소리에 시아는 움찔했다.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그제야 알았다.
자신은 아들의 아내일 뿐, 가족이 아니라는 것.
허락되지 않은 그림자 속에 머무는 사람.


시아의 남편 아로는 시어머니의 모든 것을 품은 아들이었지만,
시아버지에게는 한 번도 맞선 적 없는 사람이었다.
시아버지는 머무는 법이 없었다.
슈퍼마켓을 운영하며, 상가를 임대했고, 자동차 딜러와 체크캐싱까지 손을 뻗었다.
바빴지만 늘 여유 있어 보였고, 세상 물정에 누구보다 밝은 듯했다.

그래서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이번 프로젝트만 도와주면, 집 보증금은 아빠가 해줄게.”

그 말은 달콤했고, 구체적이었으며, 언제나 신뢰감 있게 들렸다.
시아도 믿었고, 아로도 믿었다.

그러나 마지막엔 항상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이자율이 너무 높다. 안 된다.”

그 짧은 문장이 수개월의 설렘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집 도면을 펴놓고 가구 배치를 상상하며 웃던 밤들,
그 모든 시간은 그 말 한 줄 앞에서 사라졌다. 그 이후, 시아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조용히 준비했다.
아무도 알지 못하게. 시아버지의 허락 없이,
자신들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집을 위해. 그리고 어느 날, 그녀는 아로의 손을 잡고 말없이 동네 부동산으로 향했다.

“오늘도 그 집이 남아 있다면... 우리, 계약하자.”

그 말속에는 무너졌던 시간과, 지켜지지 않았던 약속들에 대한 작은 복수, 그리고 자존이 담겨 있었다.

그날, 그들은 처음으로 누구의 간섭도 없이 집을 계약했다.
두 사람만의 선택으로 세워진 삶의 공간.
그 공간은 자유였다.


한 달 후, 시아버지의 생신날.

모든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시아와 아로는 정성껏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

“아버지, 저희가 함께 골랐어요. 생신 축하드려요.”

그러나 포장지를 벗기기도 전, 시어머니의 말이 먼저 날아왔다.

“이런 거 사지 마라. 캐시미어밖에 안 입으신다.”

그 한마디에, 포장도 리본도, 담겨 있던 마음도 조용히 숨을 죽였다.
스웨터는 손도 닿지 않은 채, 식탁 위에 그대로 머물렀다. 그 순간, 시아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잘하고 싶은 마음은 오래전에 접었다.
기대도, 상처도, 이제는 새롭지 않았다.


시아는 알고 있었다.

그 집안에서 ‘막내며느리’는 감정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화가 나도 말하지 않고, 억울해도 설명하지 않으며, 사과는 대신하고, 감정은 봉합해야 하는 존재.

그것이 그녀가 선택한 결혼의 무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아는 또한 알고 있었다.

시어머니의 수세미 색깔이 그녀를 정의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녀는 색에 길들여질 사람이 아니며, 언젠가 그 모든 색을 넘는, 자신의 삶을 만들어갈 사람이라는 걸.

시아버지의 오일은 조용했다.

오일 한 방울보다도 더 고요하면서, 그보다도 무겁게 제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바로, 시아의 사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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