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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법 P4: 이름없는 존재

소설 • 그녀가 사는 법

by 잠시 동안

아침부터 시아의 아랫배는 묵직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처음엔 그냥 위장이 안 좋은 줄 알았다. 하지만 통증은 점점 더 또렷해졌고, 의식 저편에서 어떤 불길함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싱크대 앞에서 손에 묻은 물기를 대충 털어내고, 휴대폰을 들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피가 나.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남편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엄마한테 물어볼게. 산부인과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게 전부였다. 그녀의 통증도, 두려움도, 그 한마디로 임시 보류되었다.
그리고 몇 분 뒤, 걸려온 전화는 남편이 아닌 시어머니에게서였다.

“타라. 아비는 내가 오지 말라고 했지만, 병원부터 가자.”

시어머니는 집 앞에 차를 세운 채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엔 걱정인지 불쾌함인지 모를 표정이 떠 있었다.
시아는 아무 말 없이 조수석에 앉았다. 그녀의 안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꺼져가는 듯했다. 감정도 의미도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그저 움직이는 몸뚱이 하나뿐이었다.


병원은 가까웠지만, 차가웠다.
의사는 시아보다 시어머니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마취를 하게 되면 병원에 몇 시간 더 머물러야 하고요... 비용은 이 정도입니다.”

시아는 옆방 진료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에 대한 대화였지만, 정작 그녀는 그 대화에서 빠져 있었다. 질문도, 설명도, 동의도 없이 그들은 판단했고, 결정했다.
그녀는 그 결정의 대상일 뿐이었다.

간호사가 다가와 말했다.

“마취는 없어요. 짧아요. 견딜 수 있어요.”

짧다는 말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고통은 시간으로 측정되는 게 아니었다.
차가운 기구가 몸을 벌렸고, 날카로운 도구가 어디선가 안쪽을 긁어내기 시작했다. 통증은 예고 없이, 갑자기, 깊숙이 들어왔다. 몸이 아니라, 정신이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시아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처럼 느껴졌다. 이를 악물었다. 눈물이 흘렀다.
아파서가 아니었다. 모든 게 너무 조용했고, 너무 무심했고, 너무 쉽게 끝났기 때문이었다.


시어머니는 대기실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침묵은 계속되었다.
시아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말갛고, 너무도 맑았다. 모든 것이 잘못됐다는 걸 모르는 하늘이었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시어머니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몸조리는 알아서 하거라. 다음엔 이런 일 없게 하고.”

그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 지시였고, 경고였고, 책임의 전가였다.
시아는 대꾸하지 않았다. 묵직한 몸을 이끌고 현관문을 열었다. 남편은 아직 퇴근하지 않았고, 집은 조용했다. 부엌 바닥엔 아침의 흔적—피 묻은 수건이 말라 있었다. 붉은 얼룩은 이미 색이 바래 있었고, 수건은 마치 그날의 기억처럼 조용히 굳어 있었다.
시아는 그것을 손에 들었다. 무게는 없었지만, 감정은 너무도 무거웠다. 그녀는 그대로 소파에 누웠다. 소리도, 움직임도 없이.
그리고 처음으로, 온전히 자신으로서 하루를 살아낸 순간을 맞이했다.

그제야 느꼈다.
그 아기는 오늘 세상에 태어나는 대신, 조용히 사라졌다는 것을. 이름도, 울음소리도 없이. 오직 고통만을 남기고.
시아는 그 고통을 끌어안고 누워 있었다. 정말로, 이 아이가 이 집에서 태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걸까?
하늘도 그것에 동의했던 걸까?

그날 밤, 시아는 작은 상자를 꺼냈다.
말라버린 피 묻은 수건을 조심스럽게 접어 넣고, 뚜껑을 닫았다.
그 상자는 누구도 열어보지 못할 것이다.
그날의 기억은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시아는 안다.
그 고통은 평생 그녀 안에 남아, 숨을 쉴 때마다 함께 숨 쉴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속 가장 깊은 벽에—
아무도 읽지 못할 글씨로 조용히 새겨졌다.


그 후로, 시아는 생각한다.
몸에서 피는 멈췄지만, 마음에서는 멈추지 않았다.
창밖엔 햇빛이 들고, 주전자는 물을 끓이고, 공기청정기의 바람은 여전히 일정한 소리를 냈다.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았다. 단 한 사람—시아만 빼고.

냉장고 문을 열고, 꽃을 갈고, 빨래를 개고. 그날도 평범한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수건을 접던 손끝에서, 시아는 문득 어떤 체온을 느꼈다.
이름도 무덤도 없이 사라진 그 아이의,
작고 조용한 흔적 같은 온기였다.

그것은 물리적인 감각이 아니라,
마음이 기억하는 감촉이었다.


며칠 뒤, 예고도 없이 시어머니와 동서가 집을 찾아왔다.

“청소는 좀 하니? 창문이 너무 닫혀 있잖아. 이렇게 답답하게 지내니까 몸이 더 안 좋아지지.”

시어머니는 집 안을 훑으며 말했다. 그리고 동서를 돌아보며 생긋 미소 지었다.

“얘는 진짜 효녀 며느리야. 둘째도 잘만 낳고. 막내 너처럼 속 안 썩이고 말이야.”

그 말은 칭찬이 아니었다.
절제된 공격, 조용한 경멸이었다.
시아는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말하지 않았고,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는 ‘울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 되었다.

동서는 어색한 듯 웃으며 말했다.

“막내 동서,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요~ 마음 편히 먹어야 아기가 생긴대요.
저도 첫째 때는 좀 힘들었는데, 남편이랑 사이좋아지니까 바로 됐거든요?”

그 말은 칼처럼 예리했다.
피부를 자르진 않았지만, 시아의 안쪽을 천천히 긁고 지나갔다.

“몸이 아직 좀 불편해요.”
시아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벼운 웃음을 남기고 돌아갔다.
거실에 남은 것은, 그들의 웃음소리와 시아의 무거운 정적뿐이었다.


저녁이 되어 남편이 퇴근했다. 그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엄마가 너 걱정 많이 하셔. 이제 잊고, 다시 노력해 보자.”

시아는 말하지 않았다.
말을 해버리면, 그 아기가 점점 더 멀어질 것 같았다.
그 존재마저 완전히 사라질 것 같았다.

침묵은 지금의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한 저항이자, 유일한 방어였다.

“나 혼자 있고 싶어.”

시아는 그렇게 말하고 거실 불을 껐다. 캄캄한 공간 속, 그녀는 소파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누군가의 존재를 껴안듯, 무형의 그 아기를 감싸듯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 아기는 세상에 이름도 남기지 못했다. 사진도, 무덤도 없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오직 시아만 매일 밤 그 존재를 다시 꺼내 들었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흘러가는 법, 시아는 그렇게 사는 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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