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그녀가 사는 법
시아는 오늘도 남편의 밥을 먹고, 남편의 집을 닦고, 남편의 가족을 감당하며 살아갔다. 유산 이후, 남편 아로는 그녀가 집에서 쉬면서 몸조리하길 바랐다.
“그냥 쉬어. 몸조리하며, 집에서 편히 있어.”
그 말은 따뜻하게 느껴졌지만, 동시에 무거웠다. 처음엔 고마웠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편히 쉬라’는 말 뒤에는 새로운 전쟁터로의 배치가 숨겨져 있었다. 시아는 이제 가사노동의 전담자가 되었고, 정서 관리의 대상이 되었다. ‘집에서 쉰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평가와 비난을 감내해야 했다.
“애 하나 없는 집안일이 뭐가 그리 힘드냐?” 시어머니는 며칠에 한 번씩 같은 말을 반복했다. 시아가 정성껏 닦은 바닥, 매일 바뀌는 꽃병, 청소기와 걸레 사이에 흘린 땀은 아무 일도 아닌 듯 취급되었다.
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반박하면 곧 “어디서 말대꾸야”라는 잔소리가 돌아올 게 뻔했기 때문이다.
동서는 바쁘고 잘난 척을 섞어 말했다. “나는 맞벌이라 시간이 없어. 그래도 애들 학원이며 집안일 다 챙기잖아.” 그 말은 돌려 말한 공격이었다. ‘넌 뭐가 그렇게 힘들다는 거야?’ 시아는 겉으로는 넘겼지만, 마음속에선 작고 끈질긴 불씨가 피어났다. 형님은 말 대신 눈빛으로 판단했다. ‘집에 있으니 당연히 해야지.’ 그 눈빛에는 무시와 선을 긋는 태도가 담겨 있었다. 시아는 매일 무형의 싸움터에서 전쟁을 치렀다. 비난은 눈빛으로 오고, 인정은 말없이 지나갔다.
어느 날, 남편이 출근한 뒤 조용한 부엌에 홀로 남은 시아는 익숙한 손길로 주전자에 물을 채우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켰다. 물이 천천히 끓기 시작하자 다림질을 끝낸 셔츠를 조심스레 개켜 옷장에 넣었다. 평소처럼 아무 일 없는 아침, 반복되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잠시 후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조용했고, 자신만 멈춘 듯했다. 햇살이 부엌 창을 통과해 설거지통에 남은 거품을 은빛으로 비추었다. 잔잔한 빛이 고요한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 일렁였다. 무심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매일 움직이고, 치우고, 정리하던 손끝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은… 내가 정말 원했던 삶일까?’
그 질문은 너무 조용했지만 너무도 날카롭게 마음을 찔렀다. 바라던 삶이었을까, 원했던 일상이었을까? 시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대신 마음 어딘가에 서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창밖은 환한 햇살로 가득했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조용한 회색이 감돌고 있었다.
남편은 여전히 따뜻했다. 다정한 말투, 퇴근길에 사 오는 케이크도 있었다. 하지만 그 다정함엔 어딘가 어긋남이 있었다. 그의 따뜻함은 늘 조건이 달려 있었다.
“집에서 살림만 하고 편히 있으니 좋지!” “엄마는 네가 고분고분해서 참 좋다 하시더라.”
‘고분고분함’이 사랑의 조건이 된 순간, 시아는 알 수 없는 감정의 낙차를 느꼈다. 남편의 밥을 먹고사는 삶은 편했다. 그 따뜻함 속에 마음이 놓이고, 등을 기대는 삶도 있었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잔소리와 불평에 시아는 눈치로 버무리고 인내로 삼켰다. 오늘도 그 남편의 밥 위에는 사랑과 간섭, 배려와 통제가 소리 없이 함께 담겨 있었다. 시아는 미소 지었다. 참아야 하니까, 살아야 하니까.
벌써 세 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며느리로, 아내로서의 역할에 자신을 꾹꾹 눌러 담아 살아왔다.
하지만 그 안에서 무너지지 않으려, 자신의 존재를 잃지 않으려, 마음속 어딘가를 꼭 붙잡은 채 버티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건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살아남기 위한 본능이었을까. 처음 그를 만난 날이 떠올랐다.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깔끔히 다려진 하얀 셔츠, 당당한 걸음걸이, 서툰 한국말이 미소를 짓게 했다.
“이 사람, 괜찮겠다.”
시아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세 남매 중 막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막내는 원래 사랑 많이 받고 자라지 않나요?”
그는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 말이 모든 설명의 끝인 양. 그는 온실 안의 화초 같은 존재였고, 그 온실을 정성스레 지은 정원사는 그의 어머니였다. 꼼꼼하고 집요하며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여인이었다.
그는 무엇을 먹을지, 어떤 옷을 입을지 고를 때도 “엄마는 이 브랜드가 좋다고 했어.” “엄마는 이렇게 하라 했어.”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귀엽게 느껴졌다. 어머니와 사이가 좋은 남자,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의 세계 중심에는 언제나 어머니가 있었다. 그녀와의 관계 속에서 시아는 곁가지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시아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사랑은 언제나 어머니의 시선을 거쳐야 했다. 그녀의 기준을 통과해야만 ‘괜찮은 아내’, ‘괜찮은 며느리’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세계 안에서만 완전히 존재할 수 있는 남자였고, 시아는 그 울타리 밖에서 늘 서운했다.
시아가 어떤 감정을 털어놓으면 그는 늘 말했다.
“엄마는 그런 뜻이 아니었어.” “당신이 예민한 거야.” “엄마가 우리를 얼마나 생각하는데.”
그 말들은 점점 벽처럼 느껴졌다. 사랑한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결국 ‘엄마’라는 이름 앞에서 무력해졌다. 그는 시아를 사랑했지만, 선택의 순간마다 어머니 편에 섰다. 그 선택은 매번 시아를 조금씩 무너뜨렸다.
남편은 나름대로 애썼다. 소소한 선물을 준비하고, 기념일을 챙기고, 힘들어 보이면 손을 잡아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 손길 뒤엔 어머니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이 시아의 마음을 더 서늘하게 만들었다.
시아는 문득 자신이 가족 속에 있지만 혼자임을 느꼈다. 사랑받는 것 같지만 늘 검열당하고 있었다. 그는 나이를 먹었지만, 여전히 엄마라는 온실 안에서 자라는 화초였다. 그 화초 곁에 있는 시아는 결국 그 온실 밖으로 나올 수 없는 또 다른 식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만약 그때, 처음 모든 걸 알았던 순간에 멈췄다면 어땠을까. 사랑보다 더 단단한 울타리가 있다는 걸 깨달았던 그때, 그 자리에서 돌아섰다면. 그랬다면 덜 다쳤을까.
그가 다시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아니, 아니었다. 그가 다시 찾아왔을 때, 만약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의 진심이 아무리 애타게 문을 두드려도 차갑게 등을 돌렸다면. 지금의 그녀는 어땠을까. 헤어지고 난 뒤의 그 1년, 그는 조용히 그녀 곁을 맴돌았다. 편지를 남기고, 문 앞에 작은 꽃다발을 놓고, 자신은 변했다고, 이제는 다르다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때 그녀는 믿지 않으려 애썼다. 마음을 굳게 닫았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의 눈을 다시 마주했다. 그 눈 안에서 여전히 따뜻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고, 그 따뜻함이 마음의 균열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손을 잡았다. 사랑보다는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만약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녀는 더 행복했을까.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었을까.
시아는 혼자 앉아 커피잔을 감싸 쥐었다. 그 시절의 자신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지금의 그녀는 마음 한구석에 잔잔히 고이는 후회의 물결을 조용히 받아들일 뿐이었다. 시아가 사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