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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법 P6: 바다와 침묵

소설 • 그녀가 사는 법

by 잠시 동안

세상에는 언제나 그런 부류가 있었다.
조용하면 약한 줄 알고,
말이 없으면 모르는 줄 착각하는 사람들.

그들은 먼저 큰소리를 치고, 억지를 부리며, 무시했다.
그리고 그 방식이 상대를 굴복시킬 거라 믿었다.

하지만 시아는 알았다.
조용한 사람은 약하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다만,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시아와 남편 아로는 가끔 주말마다 바다가 보이는 콘도에 갔다.
넓은 수평선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따뜻하고 아늑한 콘도.
그곳은 시아의 친정 부모님이 결혼 선물로 물려주신 소중한 공간이었다.
시아가 바다를 좋아하는 걸 누구보다 잘 아셨던 부모님은 진심을 담아 이 공간을 마련해 주셨다.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일상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였다. 콘도 지하 주차장에는 외부 업체가 운영하는 소규모 파킹장이 있었다.
평소엔 별 탈 없이 이용하던 곳이었다. 어느 날, 시아와 아로는 차에 난 큰 긁힌 자국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곧장 매니저를 불러 신고했고, 리포트가 작성됐다.
회사에서는 이틀 뒤 이메일로 사진 몇 장을 보내왔다.

“이미 있던 자국입니다.”

사진에는 날짜와 함께 긁힌 자국이 선명히 표시돼 있었다.
남편 아로는 증거 사진이 있다는 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그 말을 믿었다. 그러나 시아의 눈에는 이상한 점들이 보였다.
사진 속 시간과 같은 자동차 사진들이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시아는 증거 사진들을 천천히 꼼꼼히 다시 들여다봤다.
그리고 마침내 진실을 발견했다.

제공된 사진들은 2024년 12월 1일에 50분 간격으로 촬영되었다고 표시돼 있었지만,
두 사진에는 중요한 불일치가 있었다.

* 오전 9시 53분 16초 사진에는 차량 뒷유리에 흰색 MB 맨해튼 차량용 비닐 데칼이 선명하게 보였다.

* 오전 10시 43분 27초 사진에는 같은 차량이지만, 데칼이 검은색 덕트 테이프로 가려져 있었다.

더욱이 차 안에는 녹음 장치가 하나 더 있었다.
녹음 파일에는 그날 있었던 대화, 차량을 다루는 모습, 그들의 내부 대화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또 다른 증거 사진 중에는 12월 1일에 찍혔다고 표시된 사진이 실제로는 12월 2일에 찍힌 것들도 있었다.
게다가 이 작업에는 계약된 제3의 보안용 감시 카메라 회사까지 관여한 정황도 포착됐다.

그들은 단순히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다.
명백한 형사범죄, ‘증거 위조죄’와 ‘모해증거사용죄’에 해당하는 심각한 범죄였다. 시아는 조용히, 몇 차례 정중하게 연락하며 해명을 요구했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시아는 묻고 또 기다렸다.
침묵 속에서 상황을 바로잡을 마지막 가능성을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고요함뿐이었다.
그들은 응답하지 않았고, 회피했고, 외면했다.


집 안에서는 시댁 가족에게, 밖에서는 낯선 사람들에게
시아는 언제나 더 많이 참고, 더 많이 당하며 살아갔다.
모든 걸 견뎌야 하는 사람처럼. 말이 없다는 이유로, 조용하다는 이유로,
그녀는 어느 순간 ‘가만히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로 보이냐?”

미국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Just because I'm quiet doesn't mean I'm furniture.”
— 내가 조용하다고 해서, 가구는 아니다.

그 일이 있은 지 벌써 7개월이 지났다.
그들은 여전히 변명하지 않았고, 사과하지 않았다.
그저 피할 뿐이었다.

시아는 조용히 말하고, 조용히 움직인다.
하지만 그 조용함 속에 깃든 감정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억울함도, 분노도, 참아낸 수많은 날들도
그녀를 조용히 단단하게 만들고 있다. 지금도 그녀는 부드럽게 흘러가는 듯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마치 바닷가의 잔잔한 물결처럼—
그 아래에는 아무도 쉽게 가늠할 수 없는 깊고 단단한 힘이 흐르고 있다.


주말이었다.
남편은 시댁 식구들과 골프 약속이 있었고,
시아는 골프를 하지 못해 조용히 우버를 타고 먼저 아침 일찍 콘도로 향했다.

그때, 휴대폰에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오늘 아침 19층에 사는 두 세입자가 귀하의 아파트에서 ‘죽은 동물’ 냄새가 난다고 슈퍼에게 문자로 알렸습니다.
슈퍼가 확인한 결과, 냄새는 귀하의 문에서 나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시아는 눈을 의심했다.
그날 아침 집 안에 있었지만, 어떤 냄새도 맡지 못했다. 누구에게나 불쾌한 일은 생길 수 있다.
그 감정을 ‘차별’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의 눈에는 그녀가 그저 ‘외부인’에 불과했다.

골프장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을 입 밖에 내는 순간, 곧장 시어머니에게 흘러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시아는 알고 있었다.
그가 자주 하는 “엄마는 어떻게 생각하실까?”란 말이,
단순한 의논이 아니라 일종의 보고라는 걸. 시아는 침묵을 선택했다. 시어머니는 바다 가까이 사는 삶 자체를 못마땅해했다.
“물 앞에 사는 건 흉하단다.”
그녀는 늘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은 풍수나 미신보다 더 강한 어떤 신념처럼 들렸다.


그날의 일은 그렇게 묻혔다.
시아는 말하지 않았고, 묻지 않았고,
일상은 그 후로도 별일 없는 듯 흘러갔다.

다음 날 저녁, 시아는 남편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슈퍼가 웃으며 문을 잡아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은 늘 그랬듯 팁까지 건네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시아는 그 모습을 옆에서 조용히 바라봤다. 그날 그녀를 뒤흔든 건, 바로 그 냄새 뒤에 숨은 감정의 결여였다.

그 냄새를 핑계로 사람을 무시하고, 쉽게 단정 짓고, 경계를 그어버리는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시아는 그저 바다를 보며 잠시 숨을 고르고 싶었을 뿐인데,
그 짧은 평화마저 그녀에게는 닿을 수 없는 것이었을까?

조용한 사람을 얕보는 세상에,
그녀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증명해 보일 것이다. 시아가 사는 법이었다.

왼쪽:파킹장에서 보낸 사진 • 오른쪽: 시아가 찾은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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