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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법 P8: 그들의 방식

소설 • 그녀가 사는 법

by 잠시 동안

시아가 받은 메시지는 짧았다. 알림음도 조용했고, 화면 가득 차지 않는 단정한 문장들이었다.

“아빠가 퇴직하셔.
우리 둘이 시골로 내려가기로 했어.
너 신경 쓸 일 아냐.”

그 짧고 단호한 말들이 화면에 뜨고, 시아는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는 문장들. 하지만 그녀는 알았다. 그 말 뒤에 숨겨진 진심을. 엄마가 늘 그래왔듯이, 마음을 직접 드러내기보단 더 단단한 말들로 자신을 감싸는 사람임을. 그건 무심함이 아니라, 어쩔 줄 몰라 서툴게 내뱉는 사랑의 방식이었다.

며칠 뒤,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야.
건강 잘 챙기고.
너는 며느리고, 아내야.
네 자리에서 잘 살아.
우리는 괜찮아.”

시아는 메시지를 읽으며 가슴 한편이 조여왔다. 그 말속에는 ‘걱정하지 마라’는 위로와 ‘너는 네 삶을 살아라’는 단단한 응원이 묻어 있었다. 말은 짧았지만, 그 속에 담긴 사랑은 누구보다도 깊었다. 그녀는 답장을 남겼다.

“잘 지내지? 나도 잘 있어.”
“사진 고마워. 아빠 모습 보기 좋아.”

엄마는 자주 말을 걸지 않았다. 가끔 길가의 꽃, 밭에서 캔 고구마, 강가에 앉은 아빠의 뒷모습 같은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들은 늘 조용하고 담담했다. 시아는 그 사진들을 보며 엄마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했다. ‘네가 잘 살아야 우리도 괜찮다’는 말 없는 약속을.


그러던 어느 날 밤,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 짧은 문자 대신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아야… 엄마가, 조금 이야기할 게 있어.”

엄마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고, 그 안에 담긴 무거운 진실이 이미 시아의 심장을 짓눌렀다. 아빠가 퇴직했다던 말은 거짓이었다. 사실 아빠는 혈액암을 앓고 있었고, 시골이라던 곳은 병원 근처의 조용한 마을이었다. 심장이 떨리고 숨이 막혔다. 시아는 아로의 손을 잡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실 문 앞에 선 시아는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침대 위 아빠는 말라붙은 얼굴로, 약한 숨결로 누워 있었다. 산소마스크 너머로 힘겹게 눈을 뜬 아빠가 미소를 지었다.

“… 왔네, 우리 딸.”

그 한마디에 시아는 무너졌다. 말없이 아빠의 손을 꼭 잡았다. 미처 전하지 못한 사랑과 미안함이 가슴 깊이 밀려왔다.

“엄마… 왜 이제야…”

엄마는 짧게 답했다.

“너, 걱정할까 봐.”

그 말이 더 아팠다.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던 엄마의 마음. 끝까지 딸의 삶을 지키려던 그 사랑.

그날 밤, 시아는 병실에서 아빠의 손을 놓지 못했다. 말 대신 흐르는 눈물로 사랑을 대신했다.

아빠가 떠난 뒤, 엄마도 쇠약해졌다. 시아는 분주히 병원과 집을 오갔지만, 엄마는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낸 듯했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멀어졌을까,”

시아는 자신에게 묻곤 했다.


부모를 잃은 슬픔은 거대한 벽처럼 그녀를 압박했다. 오열과 흐느낌이 한 덩어리로 터져 나왔다.
그 곁엔 남편 아로가 있었지만, 그의 손길조차 시아에겐 닿지 않았다.
부모를 연달아 잃은 상실의 깊이는, 위로의 말 몇 마디로는 결코 메울 수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장례식 때, 아로는 시댁의 대표로 조의금을 정중히 준비해 왔다.
시아는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에 더 묻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시어머니는 부고를 듣자마자 말했다.
“이모님 계좌번호 좀 줄래? 거기로 조의금 보내게.”
시아는 당황했지만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그냥 제 계좌로 보내셔도 돼요.”

하지만 시어머니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모가 상주잖아. 직접 전해야지.”
그 말속엔 책임을 피하고 싶은 거리감이 배어 있었다. 시아는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안 보내셔도 됩니다.”

시아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끝이 식은 유리 위를 미끄러졌다.

첫 번째로 입력한 번호는 시어머니였다.

오래전부터 그녀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그 여자.

그동안 자신을 비웃고, 욕하고,

심지어 친정 부모까지 깎아내리던 사람들.

그 뒤를 이어 시아버지,

그리고 남편 아로의 형제자매들까지—

한 명씩, 하나하나, 손끝으로 번호를 집어넣었다.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았다.

시아는 숨을 고르고,

메시지를 간단명료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써 내려갔다.

"당신들이 내게 했던 걸,

이제 나도 똑같이 하겠습니다.

무시하고, 비웃고, 외면했던 방식 그대로."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딱딱한 진동음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그 감각이 묘하게 속을 후벼 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원했다.

그녀는 잠시 손을 멈췄다가,

이번엔 전화를 걸었다.

시어머니.

차분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목소리를 남겼다.

"이제 끝입니다.

평생을 참고 견디며 버텼지만,

더는 아닙니다.

제 부모님 돌아가셨고, 이제는 저만 남았습니다.

남은 인생, 저는 저를 위해 씁니다.

당신들 방식으로 살지 않겠습니다."

끊고, 다시 걸고, 또 남기고—

그 말들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남겼다.


그리고 아로와 마주 앉았다.

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더는 떨리지 않았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깎아내리는 대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나.

"아로, 나를 봐. 이게 내가 견뎌온 삶이야."

시아는 남편 앞에서 차가운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내가 당신 가족들에게 받은 상처를 당신은 이해조차 못 해."

"그동안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아로는 힘겹게 입을 닫고 있을 뿐이었다.

"시아야, 그래도 가족들이니까, 우리가 함께 풀어가자…"

하지만 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함께 풀어가자고? 그들이 가족을 모욕하고, 나를 욕하고, 사람 취급조차 안 했는데? 난 더 이상 그 ‘함께’에 포함되고 싶지 않아."

그 말에 아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럼, 가족을 버리라는 거야?"

시아는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은 내가 더 많이 참았던 거야. 이제는 다르다."

"더는 나 자신을 희생하지 않아."

아로는 이해하려 했지만, 시아가 쌓아 올린 분노와 상처는 너무 깊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등을 돌렸다.

침묵만이 공간을 채웠다.

서로를 모르는 두 사람이었다.

시아는......

"이게 진짜 내가 원하는 모습일까?"

"시아, 우리 이렇게 끝내는 거야?"

아로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래. 미안해."

"하지만 이제는 나를 먼저 생각해야 해."

그 말은 두 사람 사이의 마지막 다리였다.

아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들의 마음은 이미 멀리 떨어져 있었다.


마지막 날, 장례식장에 한 여인이 다가왔다. 병원에서 아빠의 병실을 청소했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녀는 엄마가 작은 친절을 베푼 덕분에 큰 힘을 얻었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작은 봉투를 내밀었지만, 시아는 그보다 더 큰 위로를 받았다. 엄마가 남긴 따뜻함은 이미 누군가의 삶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장례식이 끝난 후, 시아는 홀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갔다. 부모님을 떠나보낸 슬픔이 깊었지만, 그 안에서 시아는 새로운 결심을 했다.

"이제는 나의 삶을 살아야 해."

결혼식 날, 부모님은 그녀에게 말했다.

“결혼은 네가 사랑해서 선택한 사람이랑 하는 거다.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도리가 있지만, 네 삶을 잃지 마라.”

그 말은 한때 시아에게 무겁고 어려운 짐처럼 느껴졌었다. ‘도리’라는 말은 단순한 역할 이상의 것이었고, 때로는 자신의 감정조차 억눌러야 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특히 시댁에서 받은 수모와 고통, 마음 깊이 새겨진 아픔들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버거운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아는 그 모든 것을 견뎠다. 부모님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 약속이 있었기에, 그녀는 끝내 등을 돌리지 않았고, 흔들리지 않으려 애썼다.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감내해야 했던 날들이 차곡차곡 쌓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녀의 길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시아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시아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 쌓이고 쌓인 상처는 그녀를 단단한 갑옷으로 감쌌고, 부모님의 떠남, 그리고 시가 가족들의 무심한 말들, 무시와 조롱. 그 모든 게 한꺼번에 마음속에서 폭발했다. 그녀는 더 이상 사랑을 빙자한 굴레 안에 머물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도리’라는 이름으로 짓눌린 채, 자신을 희생하는 삶은 이제 끝이었다.

그 순간, 차가운 바람이 한 번 더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 속에서 시아는 어쩐지 부모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슬픔 너머에, 자신의 길이 놓여 있었다.

시아가 사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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