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내에게 |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추억하며
6. 입시 생활 시작
하루는 사모님께서 내가 머물던 숙소 맨 끝방으로 나를 부르셨다. 그곳에는 원래 이곳으로 숙소를 잡으려던 입시생들의 가방이 놓여 있었다. 다들 지낼 곳이 필요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물품들만 빼가고서 이곳에 본인들 가방을 두고 간 것이다. 나더러 방을 이렇게 더럽게 해 놓으면 어떻게 하냐며 손님들(봉사자 분들) 오시는데 왜 안 치우냐고. 화를 갑자기 내시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터져 버렸다. 당시 제일 힘들어하셨을 사모님께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나도 사람이라 그런지 내가 여기 청소하러 온 사람인 줄 아냐고 대들었다. 그 뒤로 사모님과 한동안 서먹해졌었다. 죄송했다.
순간 결심이 들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어서 슬슬 나갈 때가 되었구나 싶었다. 운이 좋게도 예전에 목사님 댁에서 같이 방을 나눠 쓰던 5명 중 한 명이 집을 구하고 있었다. 바로 연락을 해서 같이 구하자고 했다. 그 친구한테는 지금도 고맙다. 집 계약을 완료하고서 목사님께 바로 말씀드렸다. 너무 힘들고 입시 준비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아서 나가야 할 것 같다고. 도중에 도망가는 기분도 들어서 죄송했지만 나도 살고 봐야겠더라. 그렇게 교회를 나왔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내가 나가고서 3층(학생들을 위해서 3층이 가장 먼저 완공이 되었다.)의 학생들이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나간 사건이 발단이 되었는지 학생들이 단합이 잘 되었다고 하더라. 왠지 모르겠지만, 내가 나가고서 3층의 완공이 예정보다 더 빨리 되었다고 전해 들었었다. 나한테 고맙다던데 왜 그런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아는 형님의 도움을 통해서 친구와 집을 구하게 되었다. 거리의 이름은 멘델스존 거리. 그곳에서 나의 입시 준비는 제대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학원에서는 익숙해지지 못해서 계속 방황하기만 했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입시 준비 기간이 길어진 것도 아닌데 그때 왜 이리 학원에 나가기가 싫었던지.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기보다는 집을 벗어나고자 했던 이유가 가장 컸던 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비싼 돈으로 등록한 학원인데 정말 자주 빠졌다. 출석과 결석일이 거의 비슷해질 즈음 학원을 마쳤다. 물론 종강 시험도 떨어졌다. 한 끗 차이로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노력이 부족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것도 두 번이나 떨어졌다. 그때 시험 등록비만 해도 100유로였는데.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첫 입시를 낙방하고서 많이 좌절했었다. 겁도 덜컥 나버렸다. 생각보다 입시에 적응을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을 견딜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절대 작곡은 안 하겠다던 나는 한국에 있던 형에게 연락을 해서 온갖 악보와 나의 곡을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유학 나와서 입시에 대한 어떠한 도움도 안 받고 혼자서 해보겠다던 나의 욕심이 두려움으로 돌아왔다. 뭐라도 해서 붙어야겠더라. 주변 지인들 말로는 보통 한 번은 경험 삼아 떨어져 보고 그다음에는 웬만하면 다들 붙는다 했지만, 난 그 미래가 나에게는 오지 않겠다 싶었다.
한국에서 받은 악보와 내 곡을 정리하면서 두 번째 입시 준비에 몰입했다. 굳이 할 필요는 없었지만, 독일 학교에 맞춰서 안 되는 독일어 실력으로 나의 악보는 독일어로 뒤덮이게 되었다.
지휘가 부족해서 떨어졌던 나는 겁이 나서 어머니께 변명을 대기 시작했다. 일단 내가 너무 경험이 없어서 작곡으로 학교를 붙어서 학교 커리큘럼을 따라가다가 다시 입시 준비를 하겠다고. 한국에서 부모님께 드렸던 약속과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했다. 분명 최대 2년만 입시에 대한 도움을 요청드리고, 그 이후는 학교에 붙고 스스로 돈을 조달해 보는 것으로.
두 번째 입시도 사실 어떻게 지나갔는지 크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 왜냐고? 물론 작곡과 석사에도 모조리 다 떨어졌다. 대부분 입시를 볼 자격(당시에는 보통 학교 측에서 나의 서류를 검토하고서 자격이 된다고 판단이 되면 초대장을 보내왔다.) 조차도 없었으니. 작곡만큼은 자신 있어했던 나였기에 그만큼 이상의 충격이 배가 되어 나에게 돌아왔다. 눈물이 나더라.
안 되겠다 싶어서 입시 도움을 받아보기로 했었다. 이미 부모님께 재정적인 부담을 많이 드렸기에 그 이상을 요청드리기가 너무 죄송했었다. 그래도 혼자서는 한계가 있을 거라 판단이 되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안면 몰수하고 부탁드렸다.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신 나의 피아노 선생님 덕이 아니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노력한 끝에 그분의 동문/후배가 될 수 있었다.
두 번째 입시의 마지막 지역이었던 슈투트가르트. 피아노는 거의 만점 가까이 받았다. 분석 발표 시험도 꽤 괜찮았다. 사실 질문 자체가 어이가 없었지만. 그것도 운이라면 운이니깐 감사하게 생각했다. 내 곡 발표가 시작되었다. 작곡은 그만하고 지휘를 하고자 나왔던 나 이였기에 악보는 준비가 되었었지만 나 자신이 내곡에 대한 준비가 되었을 리가 없다. 어떻게 입시 당시 교수님들이 나보다 더 내 곡을 잘 간파하고 있던지. 물론 결과는 안 좋았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함부르크에 들렀다. 대학교 동문들이 그곳에서 연수를 받으러 왔다. 피곤했었지만 휴식이 필요했다. 당연 그들을 보러 갔다. 너무 고마웠다. 너무 고마운 친구들이었다. 연수받느라 정신없었을 텐데도 나를 많이 챙겨주었다.
어머니께는 한 번만 더 해보고서 안되면 들어가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아버지께서는 안되면 당장 들어오라고. 이모님께서도 안돼서 돌아간다고 아무도 뭐라 안 하니 너무 걱정 말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