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살 엄마의 일기장

8장. 열심히 살았던 30대

by 소망

대학을 떨어지고 첫째언니와 오빠의 지원 덕에 재수를 할 수 있었고, 친구가 지원하는 대학과 학과를 똑같이 지원했어. 결국 나만 붙었다. 그 친구와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는데 나는 더 난감했었어. 일단 취직이 잘된다기에 무작정 따라 온 경영학과였고, 취직을 잘하고 싶어서 학교때처럼 중상층의 삶은 살고 싶어서 취직을 잘해야겠기에 영어 동아리에 들어갔어. 그런데 나의 새로 사귄 베프는 또다른 친구들과 함께 체육동아리에 들어갔어. 체육은 남자애들이나 하는것이고 여자들은 물뜨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맘에 들진 않았지만, 친구가 있는 체육동아리와 영어동아리를 이도저도 아니게 둘다 아웃사이더로 그냥 우리 여자친구 넷이서 4년 동안을 몰려다녔어. 졸업할 당시 여자 넷은 여자 여섯으로 늘어났고 선배들의 도움없이 우리끼리 만들어 낸 프로젝트는 좋은 성적이 나올 리 없었어. 유일하게 내가 혼자 무엇가를 하기 시작한건 대학 4년때였어. 이미 그때부터 영어 토익점수가 나오지 않으면 그리고 성적이 B학점이상 나오지 않으면 지원서조차 쓸 의미가 없던 때였어. 방학마다 영어학원을 다니던 은행 지점장 딸이었던 선배언니와 달리 정확히 등록금만 데주시던 부모님 덕에 방학마다 가장 보수가 센 백화점 알바를 다녀야 했던 나는 사회 첫발 부터가 다를 터였어. 은행에 취직한 선배를 부러워하기보단 내가 할 수 있겠다 싶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어. 홀로 법학과 수업을 들었고 헌법 행정법모두 A플을 받았지. 진작 1학년때부터 아니 고2 때부터 친구 따라 서가 아니라 나의 미래를 좀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준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후회되는 대목이야. 내가 졸업하던 해는 IMF가 터졌고 영어 점수 조차 없는 나는 진즉 취업을 포기하고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학습지 회사에 들어갔어. 빨리 돈을 벌고 싶었거든. 최선을 다해 취업을 준비하지 않았던 것 같아. 조금 늦더라도 첫직장을 잘 정하는게 나은데 말이야.

엄마의 인성은 대략 초등학교 2학년 정도에 생성이 된것같다. 그리고10년간 학습지 교사와 교회학교 선생님으로 봉사를 하면서 지금의 내 성격으로 변화된것같구. 20대에 나름 나를 참 많이 좋아해준 청년도 있었고, 연애도 생각할 나이였지만 나는 취업과 성공이 먼저였던것 같다. 경제적 지원이 없어 포기했던 공무원시험도 다시 준비했어. 공무원이되려면 최소 2년은 공부에만 매진해야하고 그러려면 2년여간 교육비며 생활비 등의 지원이 있어야 하거든. 엄마가 들어준 보험을 해약하면 대학등록금 혹은 졸업후 취업준비까지의 2년여 생활비는 준비가 될것같아.

엄마는 꿈을 위해 할머니 몰래 회사를 그만두고 대출을 해서 매달 월급처럼 갖다드리며 공무원학원을 다녔어. 1년을 준비한 시험에서 0.5점이 모자라 떨어졌고, 더는 버틸 돈이 없어 다시 취업을 했어. 항상 적절한 시기에 취직도 잘한다는 친구의 말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늘 체험하며 살아왔어. 시험 결과 발표를 기다리는 3개월동안 딱 3개월만 일할수있는 계약직 자리가 났고,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정부부처에서 우연찮게(은혜로) 들어가 10년간을 일할수있게됐단다. 그 10년은 공무원시험준비 기간이기도 했어.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서울대출신들을 매일 만나고 죄다 고시 혹은 7급 합격자들이 있는 곳이야. 남들은 좋은데 취직했다 말하지만 난 그곳에서 내 일이 아닌 다른 사람 일을 지원해주는 일을 할뿐이었어. 평일은 회사, 주말은 도서관 그리고 아까운 점수로 불합격. 이런 생활이 10년이 되다 보니 서점의 자기개발서들을 섭렵하고 1회 자격증이란 자격증은 죄다 따던 시절이었어. 입사 10년차 정부부처는 세종시로의 이전이 결정되었고, 결혼도 해야하고 아이도 낳아야 하는데, 정식 공무원도 아닌 계약직으로 그 먼데까지 일하러 다니고 싶진 않았어. 물론 다른이유도 있었지만, 당시 나이 40인 엄마는 회사를 괸두고 할머니의 소개로 만난 아빠와의 결혼을 선택하게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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