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윤 Dec 20. 2022

여덟 살과 마흔 살 실패의 랑데뷰, 치얼스 앤 크로스!

회복탄력성의 조건, 너와 나

  ‘성공은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실패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톨스토이는 행복한 가정을 말했지만 나와 주윤이가 겪은 오늘의 실패에 넣으니 꼭 맞아떨어지는 문장이 되었다. 역시 고전은 힘이 세다. 아니, 오늘은 고전에 감탄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왜냐면, 나와 주윤이는 둘 다 톡 떨어졌기 때문이다.     


     

  겨울이다. 하필이면 오늘은 한파 주의보에 대설주의보가 겹친 진짜 겨울이다. 온 세상이 하얗고 하얗게 내려앉은 눈 덕분에 화안 하게 들떠있다. 나랑 주윤이만 빼고.  오늘 우리의 마음엔 구멍이 텅텅 뚫려 찬 바람이 휑휑 드나든다. 마음이 시리다.


         

  피아노 학원을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 나는 주윤이에게 소식을 알렸다.

  “주윤아, 방금 학교 홈페이지 봤는데 주윤이 합창단 오디션 떨어졌어.”

  “네에?”

  “보니까 김 0 윤이 없더라구. 자세히 봤는데 1학년 1반이랑 2반은 합격자가 있는데 주윤이 반인 3반만 없더라구. 떨어진 게 맞아.”

  “어떻게! 합창단에 떨어지다니! 아아아! 하...!”

  “괜찮아. 알지? 엄마도 지난주에 공모전에서 톡! 떨어진 거! 그때 주윤이가 떨어져도 배울 게 있는 거라고 엄마 위로해줬잖아. 그치?”

  “네, 근데요. 그래도. 어떻게 떨어져요?”



  지난주 나는 준비하던 공모전에서 떨어졌고, 시무룩하게 남편과 주윤이에게 소식을 알렸다. 처음엔 부정을 했다. 아니야, 설마 떨어졌을라구. 메일이 잘 안 되나? 하고 내가 나에게 메일을 보내보기도 하고, 발표가 늦어졌을지도 모른다는 백치미 가득한 착각으로 나의 불안을 달랬다. 그러다 결국 사실을 인정하고는 분노를 했다. 아니 왜? 내가 왜? 내가 그렇게 그저 그런가? 그렇게 내 글이 형편없나? 분노가 가라앉아 훅 파인 마음 자리에 나는 혼자 무릎을 감싸고 앉았다. 내 글은 좋은데, 어쩌면 나에게만 좋은 글인지도 모른다는 타협과 우울. 그렇게 나는 어쩔 수 없이 패배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렇게 퀴블러 로스가 제안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단계인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은 실패를 마주한 나에게도 찾아왔다.



  공모전 실패자인 나는 밥을 하다가도 “남편, 나 떨어졌잖아.” 밥을 먹다가도 “남편, 나는 진짜 될 줄 알았거든.” 설거지를 하다가도 “남편, 안 안되나 봐.”를 반복했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처럼 내 마음에는 차가운 패배주의가 내리고 내려 쌓여갔다.  


              

  그런 내게 여덟 살 주윤이가 위로를 건넸다. “엄마, 그래도 배운 게 있잖아요. 엄마가 실패에서 배우는 거라고 했잖아요.” 이미 맥주를 한 잔해서 마음이 촉촉했던 나는 위로를 건네는 여덟 살 주윤이를 꼭 안아주었다. 주윤이의 말에 내 마음에 내린 패배의 대설주의보가 쨘! 하고 걷힌 것은 아니었다. 어떤 말도 온전한 위로가 되긴 부족했다. 내 실망감은 결국 내 것이기에. 그래도 실패한 엄마에게 다정한 위로를 건네는 주윤이가 고마웠다.           



  그랬던 의연한 여덟 살 주윤이는 자신의 실패 앞에 소리를 지른다. 역시, 나와 주윤이는 타인이 맞다. 실패는 개인의 몫이 맞다. 실패한 사람의 마음엔 야수가 할퀸 상처가 고스란이 남는다. 타인의 위로는 상처에 약을 발라줄 수는 있어도 그 선명하고 붉은 상처의 시린 아픔은 온전히 각자가 견뎌야만 한다. 아무리 엄마와 아들이라고 해도 각자의 실패에 대해서는 타자이다. 우리는 서로의 실패에 위로를 건넬 수 있지만 실패를 인정하기까지 온 마음을 가득채우는 선명한 부정과 분노는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우리는 학교 합창단 오디션을 준비하겠다고 한 달전부터 동요를 골라서 연습했던 열혈 모자였다. 게다가 나는 주윤이가 하는 것은 다 예뻐 보여서 노래 연습하는 주윤이 동영상을 찍고는 늘 흐뭇해하는 고슴도치 엄마였다. 아마 그런 내 호들갑과 감탄이 주윤이에게 합격이라는 의심 없는 확신을 심어준 것 같기도 하다. 아니, 내 눈에 예쁜데, 명랑하고 또랑한 목소리가 올망졸망 입에서 나오는데 어떻게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있나! 하지만 이젠 태세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길을 잘못 들었으면, 빠른 U턴도 전략이다.        


   

  “주윤아, 아무래도 기존에 남자 친구들이 많으니까 이번엔 여자 친구를 많이 뽑은 것 같아.”

  “주윤아, 있지. 합창단은 나중에 주윤이 고학년 돼서 변성기 오면 노래 부르기 어렵데. 그리고 합창단은 노래할 때 귀여운 율동도 좀 하거든. 고학년 되면 남자 친구들은 그거 좀 부끄러워한데.”

  일단은 합리화를 시작한다. 우리의 실패는 실력뿐만 아니라 상황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 한 스푼. 그리고 너무나 좋아 보였던 합창단 활동에 대한 신포도 한 움큼. 합창단에 떨어진 게 그렇게 큰 일은 아니라는,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방향으로 운전대를 좀 꺾어 본다.           



  주윤이도 살짝 진정이 되는 듯하다. 그렇다면 다음 스텝. 플랜 B.

  “주윤아, 우리는 플랜 B가 있잖아. 2학년 때는 방과 후에서 첼로 배우자. 그래서 3학년때 오케스트라를 해보는거 어때?"

  “첼로요?”

  “응, 첼로. 소리도 중저음이라서 부드럽구. 첼로는 앉아서 연주하잖아. 그래서 내 손을 잘 내려다보고 연주할 수 있어서 배우기 좋데.”

  “음, 앉아서 연주하는 건 좋아요. 단, 그러면 다른 방과 후는 과학탐구 꼭 해야 해요.”

  “좋아! 주윤이가 과학탐구 진짜 좋아하잖아. 2학년 때는 첼로랑 과학탐구 하자!”

  주윤이의 화가 좀 누그러졌다. 다행이다.           



  거기서 그치면 다행일 것을, 주윤이의 일이라면 언제나 감탄할 준비가 되어있는  엄마는  상상을 해버렸다.  머릿속에 주윤이는 이미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을 연주하고 있다.  셔츠를 입은 주윤이는 목은 살짝 꺾고 첼로와 하나가 되었다.  신경을 다해 연주하느라 이마에 맺힌 땀은 아름답기만 하다.  쉽게 설레어 버렸다. , . 나는 이미 흐뭇해졌다. 한파주의보가 내린 저녁이 그다지 춥게 느껴지지 않는다. 첼로를 배우는 주윤이는 얼마나 근사할까.



  그런데 주윤이가 옆에 없다. 분명 우리는 피아노 학원이 끝나고 같이 동네를 걸어오는 길인데! 어디 갔지? 하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뒤에 주윤이가 오고는 있다. 주윤이는 바닥에 쌓여 단단한 눈을 신발로 쿡쿡 파느라 고개도 들지 않고 걸어온다. “주윤아! 어서 !” 나의 재촉에 주윤이는 걸음을 서두른다. 이번엔  가에 쌓인 눈을 일부러 발로 차며 걸어온다.          

  “엄마, 눈을 발로 차니까 마음이 좀 풀려요.”



  주윤이는 속상했다. 떨어지다니. 한 달을 준비했는데. 연습하면서 동요의 예쁜 가사를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채웠던 그 시간과 공간이 참 좋았는데. 호들갑쟁이 엄마의 감탄을 쑥쑥 먹느라 마음도 한껏 불렀는데. 당연히 될 줄 알았는데. 떨어졌다. 주윤이의 발 끝에서 떨어질 줄 모르고 달려있는 속상함이 내게 전해졌다. 아니, 이제 여덟 살인데, 겨우 일 학년인데 좀 붙여주지. 엄마의 생떼가 마음속에서 피어오른다. 갑자기 내 마음에 속상함이 와락 울렁인다. 에이. 속상해.    



   그래도, 현관 문 앞에 도착하자 차가운 뺨을 녹이는 싱그러운 미소의 주윤이가 내게 먼저 말을 건다.

  “엄마, 오늘 저녁은 조기 먹고 싶어요.”

  “그래, 그래. 주윤이가 좋아하는 조기 먹은 지 오래됐네. 일도 아니지! 아! 우리 파티해야겠다. 실패 파티!”

  “실패 파티?”

  “응! 엄마도 지난주에 실패했잖아. 주윤이도 실패했고. 그래도 우리가 뭘 했으니 실패했겠지? 실패하려고 우리 노력했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서로 알아주자. 어때?”

  “좋.... 아... 요!”          



  시린 바람이 우리의 구멍난 마음에 대차게 불어닥치는 이 추운 날, 우리는 각자 마음속에 처절한 패배 하나씩 가진 실패 동지가 되었다. 여덟 살이든 마흔 살이든 누구나 마음속에 실패 하나쯤 갖는 것, 그게 인생 아니겠나.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도 우리의 삶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이루기 위한 필요조건은 믿어주는 사람의 존재이다. 비록 오늘, 우리의 노력이 세상에 미치지 못했고, 부정당했지만 우리에겐 너랑 내가 있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할, 어쩌면 너 나아질 든든한 조건을 이미 갖추었다. 게다가 우리! 겨우 여덟살이고, 이제 마흔 살이다. 우린 아직 시간부자이다.



  주윤아, 알지?

  상처에 약 발라주면 더 빨리 낫고 흉도 덜 진다! 우리 각자의 실패를 견딜 때 고운 손으로 약 발라주며 살자.



  나는 맥주, 주윤이는 우유. 쨘! 오늘 우리의 우주에서 너의 실패와 나의 실패가 이룬 랑데뷰는 짠했다. 하지만 우리, 그래도 간다. 우리가 가꾸는 각자의 우주는 아주 깊고 은은하게 반짝이니까. 우리는 서로의 우주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언제나 우리, 서로 감탄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믿는다. 너의 실패와 나의 실패! 치얼스! 앤 크로스!  



  


이전 03화 칭찬의 나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