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 마리의 순록이 풀밭이 있는 초원을 찾아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이동하는 걸보고 마음이 울컥해졌다. 우리가 미물이라고 생각했던 저들도 삶의 의지를 버리지 않고 밤낮 쉬지 않고 강행군하는 것이 못내 안쓰러웠다. 하루에 육천 칼로리를 소비할 만큼 힘든 여정이다. 게다가 익사의 위험을 무릅쓰고 급류를 건너야 하며 길목마다 늑대와 곰이 자신들의 목숨을 노리고 있어 잠시도 방심할 수 없다. 방심하는 순간 늑대에게 목덜미를 물리게 되고 생명을 마감하게 된다. 겨우 도착해 새끼를 출산한 곳이라고 안전한 곳이 아니다. 흡혈 모기를 피해 또 떠나야 한다. 생명을 가진 것들은 다 힘겹다. 늑대의 입장도 전혀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늑대에게 인간과 같은 동정하는 마음이 있다면 오래전에 이미 멸종되었을 것이다. 바이러스를 상대하기가 버거운 건 인간과 달리 자비심이란 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미물이라는 데 있다.
인간이라는 어머어마한 신분으로 태어났으니 여러 가지 특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얼마 전에 타이어를 사면서 계속 흥정하니, 가게 주인이 솔직하게 말하던 것이 기억난다. '세상에 싸고 좋은 것은 없습니다.' 인간으로서의 혜택만 누리고 그에 대한 대가는 전혀 없을 수 없다는 말로 대입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할 수 없는 불운이 인생엔 꼭 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길 정도는 아니라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이따금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만 받아들여도 사는 게 한결 수월하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맺었던 인연과의 단절에 따른 상실감도 크겠지만 죽음에 수반되는 가장 큰 고통은 역시 “잃었던 왕관을 다시 찾아 왕이 될 수 없다.”라는 절망감에 있다. 누구나 자신의 영역에서는 자신이 왕이다. 역량이나 시운에 따라 그 지경의 넓이가 차이는 있을 수 있어도 본질적으로는 같다. 자신의 현재 처지가 어떻든 재기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면 ‘축복’이라 할 수 있다.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에서‘빛나는 촉루’를 노래했는지 모르나 벽제의‘분쇄 실’(pulverization chamber)에서 체험한 바로는 생명의 약동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극명한 깨달음을 주었다. 역시 ‘무덤이 우리의 목표’는 아니다.
세 번째 항해에서 신밧드는 무서운 뱀을 만났다. 우선 나무 위로 피하기로 했다. 그러자 그 뱀은 신밧드를 쫓아와 그의 아래 앉아 있던 한 사람을 통째로 삼켰다. 절망한 신밧드는 두려움에 떨며 바닷속으로 몸을 던지려 했으나 절망하지 않고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여기서 신밧드가 생명을 포기했더라면 그 이후에 일어난 온갖 영화를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현실의 세계에서도 한 순간의 고비를 넘기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일을 흔히 본다. 가까운 친지에서도 몇 번 그런 일을 겪고 나니 결코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님을 실감한다. 절망은 흔히 고통과 우울 그리고 고독감을 동반한다. 위로와 격려 없이는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심연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감의 회복인데 이는 평소에 작은 것들을 실행해 봄으로써 자신만의 성공 이야기(success story)를 계속 축적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어떤 분야든 좋다. 자신만의 성공 경험은 자존감의 원천으로 여간해서는 무너지지 않는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통이나 절망이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내쉬빌에 있는 어떤 신문사에서 “누가 절망과 고통에 빠져 있는가?”라는 주제로 글을 쓰면서 한 교회에 그런 사람들의 명단을 부탁하자 그 교회의 목사가 보내온 것은 전화번호부였다. 절망과 고통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