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에 함몰되지 않기 위한 답을 찾아서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이제껏 없었는가?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tists?]
-린다 노클린 저-
저자가 이 책을 출판한 때가 1971년이고 지금은 2025년이니 거의 50여 년의 격차가 벌어지지만 인간의 역사 중 여성의 역사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기에 여전히 공감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질문에는 미술가 대신에 작곡가, 과학자, 철학자, 장군, 대통령, 지도자 등으로 대체하는 물음이 그 속에 담겨있다 할 수 있다.
물음에 대답을 하다 보면 은연중에 부정적 함의를 강화하는 사태가 벌어져 진정 긍정적 함의를 향해 가지 못하게 된다.
말하자면 어느 정치가가 자신이 무죄임을 스스로 밝히려 하다 보니 그 문제의 부정적인 면에 파묻혀 자신의 긍정적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허덕이는 꼴이 되어 아주 비루해지는 안타까운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여성이니 남성이니 천재성이니 둔재성이니 하는 개인적 감성에 휘말릴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회적 제도적 상황을 보고 그것의 공평성을 탐색하는 것이 올바른 길을 찾는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이 우리는 현재 존재하는 것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며 무비판적인 수동성인 생각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특히 아주 사소한 이득이라도 누리고 있는 특권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그것을 유지하고자 한다. 하물며 커다란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기존의 남성 위주의 자연스러운 사회적 제도를 포기하는 남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특권을 유지하려는 자들과 개별적으로 맞서면 길을 잃게 된다. 단지 현재 사회적 제도가 어떻게 그 특권을 지지하는지 그것이 공평한 것인지를 따지고 제도의 개선책을 찾아내야 제대로 된 답을 찾아가게 된다.
이처럼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이제껏 없었는가?]에서 저자 린다 노클린의 주장을 요약하면서 나의 생각들을 곁들여 보았다.
여성이라는 강력한 수동적 문화 속에서 살아온 한 여성으로서, 그리고 수동성이 많이 개선된 요즘 시대에 여성을 키워내는 여성으로서 많은 것을 뒤돌아 보게 된다.
아직도 그 문화를 극복하지 못해 내면화된 습성들을 딸에게 물려줄까 염려하고 조심했는데도 간혹 아이의 모습 속에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도 시대가 달라졌고 제도가 달라지고 있으니 억압을 물리칠 강력함이 보여서 조금은 안심이 된다.
이렇게 조금씩 강력하게 오랜 세월 유지된 제도가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어 좋고 변화시키는 주체자가 되어 미미하나마 참여할 수 있어 더 만족스럽다.
집에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식사를 챙기는 것보다 이렇게 좋은 휴일 조용히 도서관에 나와 나만의 시간을 갖는 내가 좋다.
스스로의 습관이 가족들의 습관으로 받아들여지는 내 가족제도를 형성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