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무뚝뚝
저녁을 먹고 창밖을 보니 어둑어둑하다.
어둠과 함께 갑자기 밖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창문의 걸쇠를 모두 걸고 현관문 안전고리까지 걸었다. 조금은 안심이 된다.
드라마를 보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찾아온 공포는 막을 방법이 없다.
무서움을 생각하고 잠이 들어 꿈속에 공포가 출현한 것인지 꿈속에 위험 요소가 있어 무서운 것인지 그저 무의식적으로 내재된 공포가 발현된 것인지 모르겠다.
잠에서 깨어나도 한동안 그 공포의 안갯속에 잠겨 있었다. 겨우 일어나 씻고 아침을 먹고 밝은 해를 마주하니 공포는 눈 녹듯이 사라졌다. 기억만 아주 조금 남아 있거나 기억도 못 할 정도이다. 내가 왜 그랬나 싶을 정도이다. 하루 종일 쳐져 있지 않기 위해 오늘도 수영을 하러 갔다.
수영장에 걸어 다니는 것보다 느린 수영자 한 분이 아주 열심히 날마다 쉬지 않고 수영하신다. 그분이 레인을 출발하면 25미터의 삼분의 일도 못 가 다른 수영자들이 줄줄이 서서 걸어가게 된다. 할 수 없이 중간중간에 수영자들이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 턴을 하거나 무질러 가는 현상이 일상화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 때문에 지체 현상은 끊임없이 발생했다. 워낙 연세도 있고 쉬지 않고 수영을 하시기 때문에 뭐라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인가 싶다. 자세히 보니 다리는 가만히 떠있고 한 팔도 어디가 불편한 것인지 고정된 채 오로지 오른팔 하나만을 사용해 수영을 하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인상도 무뚝뚝함을 넘어서 있어서 말을 붙이기도 어렵다. 그분이 레인 삼분의 이쯤 거의 도달했을 때 출발을 해도 끝에 못 가서 겹치기가 일쑤이다. 배영을 하면 안 보여서 겹쳐진 것인데 엄청 무섭게 노려보고 사과를 해도 받지도 않는다.
몇 번을 겹치니 그분이 할 때는 거의 포기하다시피 미루거나 중간 턴을 해서 수영이 아닌 물장구치는 수준으로 하다가 그분 피해 겨우 한두 바퀴 수영을 제대로 하게 된다. 다행히 그분은 30분 되면 나가기 때문에 그 뒤에는 20분 정도 다들 안심하고 수영을 할 수 있다.
한 번은 정말 이 정도면 겹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천천히 갔는데 겹쳤나 보다. 그분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배영이라 보이지도 않았고 거의 다 왔기에 일어섰다. 그런데 부딪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출발선에 그분이 계셨다. 어쩌지 하는 생각으로 그분을 보았는데 무뚝뚝하게 화난 것처럼 나에게 뭐라 하는 것이었다. 뭐지? 왜 저러지? 하는 생각과 더 이상 연장자라고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 싶어서 '왜 그러세요?'하고 좀 까칠하게 따지듯이 화가 나서 물었다.
그랬더니 여전한 표정으로 '가!'라고 하지 않는가. 가라고요? 하면서 동시에 내 몸이 출발하고 있었다. 레인에서 수영하면서 가라는 말과 그 표정이 생각나서 웃음이 났다. 그리고 그전에 나하고 겹치기가 된 사람이 그분이었나 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를 낸 것이 아니라 그분의 표정이 본래 그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기도 하고 오해한 것도 있고 안 되기도 했다. 아마 팔순이 넘었을 듯하다. 다리는 힘없이 늘어져 휘어 있다. 상체만으로 그것도 한 팔로만 해야 할 상황이 있나 보다 싶다.
마음이 가니 그분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지고 피해서 요령껏 수영을 하고 있었다. 스트레스도 덜 받으니 몸에 힘이 덜 들어가 수영하기도 수월했다. 힘없는 다리일망정 조금씩 움직이면 몸에도 좋고 속도도 좀 나고 할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걸어 다닐 정도이면 분명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이래저래 피하기만 하지 않고 적응해서 공존하려 하다 보니 안 보이던 것이 보여 하루가 지루하지 않다. '가!'라는 그 말과 표정이 그분의 배려였다니. 아마 쉬지 않고 수영하고 있으니 웃을 여유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ㅎㅎㅎ 따듯한 무뚝뚝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