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역사 삼국지와 소설 삼국지가 있다. 그중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는 동아시아에서 600여 년 동안 사랑받은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특히, 대한민국의 남자들은 삼국지를 읽는 것을 국민의 4대 의무 중 하나로 착각을 하는지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어보지 않은 사람하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라는 헛소리도 심심치 않게 떠버린다.
오죽하면 소설 하고는 담을 쌓은 나 같은 인간도 친구들과의 인생을 논하는 자리에서 소외되는 것이 두려워 서너 번을 읽었을 정도이니 대단한 소설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헛소리를 내는 인간들은 남성우월주의에 빠진 쪼잔한 인간이거나,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부족한 인간일 가망성이 백퍼센트다.
백만 대군이 하룻밤에 수만 명으로 줄어다거나... 혹은, 준비 없이 전장에 뛰쳐나갔는데 거느린 병졸이 수천 명이었다는 허무 맹랑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물론 중국사람들의 허풍을 감안하더라도,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대한민국 국민들이, 특히 남자들이 왜 열광했는지, 자칭 휴메니스트인 나로서는 이해 못 할 일이다.
백만의 군사가 몇 만명만 남았다면, 사라진 군사는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것에 대한 서술이 없다.
그 사라진 군사들은 우리의 생때같은 자식이요! 불쌍하고 가녀린 여인의 지아비요! 어린아이들의 아비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사라져 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없는 것인가?
오로지 승리에만 도취되어 자신을 망각하는 것은 아닌가? 이야기에 등장하는 죽지 않는 영웅들은 우리의 이웃이 아니다. 우리의 이웃은 이름 없이 죽은 수만의 병사들이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 중 천하의 절색이라는 초선(貂蟬)은 왕윤의 수양딸로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하는 여인으로 묘사된다. 대의(大義)를 위하여 희생된 여성이기도 하지만, 요부(妖婦)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는 어떠한 도덕적 기준이나, 순수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롯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써의 여성만 존재할 뿐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초선 대신 쥴리가 등장한다.
삼국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김범수 아나운서를 동서(同壻) 화합 차원으로 대통령 취임식의 진행자로 추천하자는 우스개 소리도 떠돌고 있고, 프랑스의 르몽드에서는 콜걸이란 단어가 등장했다.
제갈량의 비단 주머니가 현실로 변하는 지금의 사태를 보면서 아직도 허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