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기다림이다.

by 한지원

요즘의 괴산은 신선이 사는 동네다.

대한민국의 가을이 구석구석 안 이쁜 곳이 없겠냐마는, 그래도 으뜸은 내가 사는 동네 괴산이다.

버스길 옆에는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길가에 도열한 가로수들은 정열적인 붉은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작은 잎으로 선정적인 자태를 간신히 가리고 있어, 뱃가죽이 불어나도록 먹은 점심 때문에 식곤증에 시달리던 버스기사의 눈도 번쩍 뜨이게 한다.

길옆의 작은 개울은 바닥의 모래를 헤아릴 수도 있을 것처럼 맑은 물이 흐르고, 들판의 곡식들이 땅내를 맡듯이 노란 머리를 숙이고 있어, 주변이 온통 가을로 치닫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경상북도의 끄트머리도 괴산 시골버스의 활동무대다. 내가 버스를 몰고 다니는 노선의 중간쯤에 괴산 청천면의 송면리와 경북 상주시 화북면의 입장이 사이에 있는 '장담'이라는 승강장이 있다.

왜? 충북의 버스가 남의 동네까지 가서 껄덕거리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하여 설명을 드리자면...

익히 말씀드렸듯이, 시골 버스의 노선은 예전부터 그 땅에 살아온 사람들의 생활공간을 쫓아서 생겨난 것이다. 자연발생 부락을 이어주던 오솔길이 확장되어 버스노선이 생겼다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괴산군의 버스가 경북의 언저리까지 운행을 다닌다.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시골 버스기사가 주변 풍광에 취하여 임의 데로 돌아다니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말씀드린다.


승강장 사진을 자세히 보면 도시의 그것과 다른 점이 있다. 눈썰미가 있으신 분은 금방 눈치를 채셨겠지만, 아무리 봐도 차이를 모르시는 분이 계시다고 해도 너무 자책하지 마시라. 사람이 살아감에 눈썰미는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까...

정답은 "문이 있다."것이다.

시골마을 점방(구멍가게) 입구에 있을 법한 문이 달려있다. 도시에는 없지만 시골 승강장에는 문이 달려 있는 곳이 종종 있다. 특히 벌판에 홀로 서 있는 승강장에...

'별이 다섯 개'라고 자랑하는 모 회사의 돌침대처럼 승강장 의자를 따뜻한 돌 벤치로 만든 곳도 있지만, 나는 문이 달린 승강장에 정감이 더 간다.

승강장에 들어가 문을 닫고 앉아 있으면 경치 좋은 카페의 창가 자리를 차지한 느낌이 있어서 좋다. 커피라도 한 잔 들고 있으면 좋으련만 주변에 커피 자판기 조차도 없다.


이런 승강장에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계시는 분이 있다.

내가 '장담' 승강장을 지나칠 때마다 꼭 마주치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신다. 머리는 얼마나 안 감았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떡진 머리칼과, 한 겨울에나 입음직한 솜바지, 누군가에게 얻어 입으셨을 정유회사 마크가 선명한 점퍼와, 낡은 슬리퍼... 이것이 그분의 입성이다.

그분을 버스 타시는 분으로 착각하여 매번 정차를 하는 나도 문제가 있지만, 매일 승강장에 나와 하루 종일 계시는 할아버지는 혹시 치매노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누구를 기다리시는 걸까? 아니면,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어서 승강장에 앉아 계시는 건가?


추석 연휴 중 마지막 하루를 제외하고는 모두 근무일이었다. 추석날도 예외 없이 시골버스 기사는 아무도 없는 텅 빈 버스를 몰고, 가을 하늘을 만끽하면서 시골길을 가로질러 그 승강장을 지나치는데 그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노인은 오늘도 미닫이 문이 달린 승강장에서 아무도 오지 않을, 마음속의 가족을 기다리고 계시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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