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론의책 Oct 11. 2024

고딕지구 시간 여행을 하다



https://www.tripadvisor.com/LocationPhotoDirectLink-g187497-d208586-i53389776-Hostal_Fernando-Barcel


어둑해지는 거리를 걷는다. 붉은 노을이 하늘에 번지고 람블라스 거리에 조명도 불이 켜진다. 하늘에 빛은 사라지지만, 대지에 빛은 가로등을 통해 솟아오른다. 

샹그리아를 먹은 건지  와인을 먹은 건지  얼굴이 불그스레한 청년이 콧노래를 부르며 내 곁을 스쳐간다. 청년이 걸어왔던, 그 길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KFC와 MacDonald 사이에 뻗어 있는 그 길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나는 끌려가듯 청년이 나왔던 방향으로 걸어간다. 

로마에 반석과 같은 돌들이, 대지에 촘촘히 박혀있고 세월의 흔적 속에도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내가 밟고 있는 너는 알겠지.

거리를 걷다  잠시 시선을 오른쪽에 두었다. 그 짧은 찰나에 길의 이름이 보였다.

<C/de Ferran>


페르난도 국왕의 이름에서 유래한 거리. 그 거리에 은은하게 부서지듯 터지는 조명과 함께 길을 걷는다.

 엄마 손잡고 해맑게 웃는 아이와, 그런 아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꼭 쥐고 가는 엄마의 모습이 눈에 비친다.

과거에는 마차가 지나다녔다는, 페란 거리에 중앙을 걸으며 수백 년 전 바르셀로나를 상상해 본다.

 갑옷을 입은 기사와 멋지게 차려입은 귀족들, 마차를 끌고 다니는 마부와 그 곁을 비켜가는 시민들. 

마치 이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과거에도 동일하게 존재했을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던 이유는, 완벽하리 만큼 중세의 모습이 잘 본존 되어 있는 건축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조금 더 깊이 깊숙이 길을 향해 발걸음을 향했다. 그리고  길을 가다 멈춰 선 그곳에서 이상하리 만큼 익숙한 글씨를 읽게 되었다.

<Carrer d' Avinyo>


아비뇽 거리? 피카소가 이곳을 걸었던 것일까? 바르셀로나 페란 거리를 걷다 만나게 된, 아비뇽 거리는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아마도 피카소가 그린 아비뇽의 처녀들이라는 작품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그날 걸었던 그 거리는 매춘부들이 살았던 곳이었다. 그리고 피카소는 아비뇽 거리에 매춘부들을 보면서 받은 영감을, 그의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에 남겨두었다.

프랑스의 아비뇽 거리가 아니라, 바르셀로나의 아비뇽 거리가 천재화가 피카소의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는 사실에 나는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같은 것을 보고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따라 예술이 되고 작품이 되는 것을 보여준 피카소.

그가 매일 같이 걸었던 그 길을 나도 걸었고 그의 흔적을 그 길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페란 거리의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조금은 우울하고 어둡게 느껴졌던 그 길이 15세의 피카소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피카소가 걸었던 아비뇽 거리에 나도 모르게 취하여서, 페란 거리에서 발을 떼어 피카소가 걸어간 그 길로 방향을 틀어 들어갔다. 어둑어둑해지는 골목으로 들어가자,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나를 덮쳐왔다.

벽에다 누군가 노상방뇨를 하고 간 것인지, 벽을 타고 바람을 타고 흘러나오는 지린내는 나의 고개를 좌우로 흔들게 만들었다. 그래도 다시 돌아가기는 싫었다. 그래서, 나는 더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Placa de Sant Felip Neri >



https://en.wikipedia.org/wiki/Pla%C3%A7a_de_Sant_Felip_Neri


어느덧 길은 작은 광장으로 이어졌고 광장은 은은한 조명 덕분에 어둡지는 않았지만, 스산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나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했고 글귀들을 찾아 읽어 보았다.

"1938.1.30"

1938년 1월 30일. 스페인 내전 중에 폭탄이 떨어져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던 현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민족상잔의 비극이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스페인도 내전을 치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유도 모르고 죽어야만 했던 아픈 상처를 간직한 나라였다.

그리고 그 흔적을 지금도  복구하지 않고 유지하는 것을 보며 역사를 대하는 그들의 자세에 존경심을 표하게 된다. 

잘못된 역사를 그대로 기록으로 남기고 후대에는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자세. 그것이 우리가 스페인에 배워야 하는 자세이지 않을까.

산펠립네리 광장은 가우디와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먹여살리는 천재 건축가 가우디. 그는 신앙심이 깊은 인물이었다. 

매일 미사를 드리기 위해  산펠립내리 광장을 찾았다. 성가족성당 건축의 일을 마치고  작은 성당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이 그의 안식이었고 기쁨이었다.

그리고 가우디는 그의 생애 마지막 날도, 산펠립네리 광장에 있는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였다. 그 걸음의 재촉이 그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지 못하였다.

지금은 저녁이기에 아이들을 볼 수 없지만 현재 산펠립네리 광장에는 유치원이 있다. 

전쟁의 상처로 얼룩진 현장이었던 곳이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뀐 것을 보며 스페인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한참을 광장의 매력에 빠져있다가 무심코 손목시계를 보았다. 지점장과 헤어진 후 이미 2시간이나 더 지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너무 늦게 숙소에 들어간다면, 씻는 것도 눈치가 보일 것 같다.

나는 서둘러 고딕 지구 현장을 빠져나와, 숙소가 있는 카탈루냐 광장 근처로 이동하였다. 

오늘은 제발 밤새 핸드폰을 보며 달그락거리는 청년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