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정사에서 일주일을 머물다.
몇 년 전 지인의 소개로 전북 남원에 있는 귀정사에서 일주일간 템플스테이를 한 적이 있다. 일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다섯 밤 여섯 날, ‘쉼’과 ‘체험’이 적절히 어우러진 여정이었다. 이곳에서는 ‘인드라망 사회연대 쉼터’를 함께 운영하며, 사회적 약자와 민주주의를 위해 애쓴 이들을 위한 숙식 공간을 무료로 제공했다.
첫날은 비가 많이 내렸다. 차창 너머로 흐릿하게 번지는 능선과 산의 윤곽은 안개에 감싸여 화선지 위의 수묵화 같았다. 흠뻑 젖은 차창 풍경이 낯설면서 한편으로는 차분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귀정사는 오후 세 시가 조금 넘어서 도착했다. 법당에는 처사님과 세 명의 참가자들이 바른 자세로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처사님은 첫마디부터 진중했다. 귀정사의 역사와 부처의 형상, 사천왕에 얽힌 이야기까지 들려주셨다. 놀랍게도 아미타불, 미륵, 석가모니불 모두 같은 얼굴이란다. 처사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어릴 적 무섭게만 느껴졌던 사천왕도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요사채에 짐을 풀고 귀정사 경내를 찬찬히 둘러봤다. 돌담에 기대 선 대나무와 이끼 낀 돌계단, 물기 머금은 나뭇잎들이 빗방울에 반짝이고 있었다. 처마 끝에 매달린 연등이 바람에 흔들리며 달그락대는 소리가 산사의 깊은 정적을 깨뜨렸다. 찰칵, 찰칵. 스마트폰을 꺼내 산사의 풍경을 몇 컷 담았다. 사진마다 촉촉하게 젖은 초록의 결이 살아있다. 전에 갔던 순천의 선암사와 비슷한 느낌이지만, 이곳은 좀 더 아담하고 다정하다.
공양은 채소 위주의 소박한 식사였다. 깻잎과 묵은지는 깊은 맛이 났고, 콩나물국은 조금 싱거웠지만 눅눅하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밤이 되면 배가 고플 것 같았다. 컵라면을 챙겨 오길 잘했다. 술과 담배는 금지지만, 이 맑은 공기와 풀벌레, 새소리에 취한다면 충분히 견딜 수 있으리라.
다음 날 아침, 격자 창문 사이로 노란 햇살이 스며들었다. 새벽이슬을 머금은 풀벌레와 이름 모를 새소리가 문틈을 비집고 방 안으로 들어온다. 두 눈은 감은 채 양쪽 귀를 열어 산사와 인근 산야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자연의 소리들을 들었다.
오전엔 처사님이 진행하는 마음 챙김 명상에 참여했다. ‘명상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라는 처사님의 말이 마음을 울린다. 호흡에 집중하고, 흐트러지려는 상념을 숨결로 되돌리는 연습을 했다. 간단하지만 쉽지 않았다.
점심 후엔 배롱나무 앞 벤치에 앉아 가지고 온 책을 펼쳤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라는 제목처럼, 이곳은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사사삭, 다람쥐 한 마리가 돌담을 오른다. 순한 눈을 가진 고양이 보리는 사찰에 머무는 순례자들에게 제 몸을 슬며시 비벼댄다. 짧은 다리로 절을 누비는 웰시코기 산동이는 산사 어디서든 나타난다.
템플스테이 삼일 차다. 오전에 만행산 천황봉을 오르기로 했다. 이정표를 보니 정상까지 1.6km다. 남한산성을 제외하고 산행은 10년 만이다. 산 초입부터 경사가 가파르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숨이 거칠어진다. 온몸은 땀으로 젖는다. 바람결에 묘한 풀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길가에 핀 꽃들과, 묘역 주변에 핀 하얀 야생화들이 다정하다. 산중턱을 지나면서 수풀 사이로 희붐한 빛이 번진다. 나뭇잎 사이로 내리꽂히는 햇살은 금가루 같다.
전주 이씨 지묘를 지나며 털썩 주저앉은 채 잠시 숨을 고른다. 세 번쯤 발길을 돌릴까 고민했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굵은 밧줄을 잡고 바위를 딛는 마지막 구간, 온몸은 너덜너덜했지만 마음만은 가벼웠다.
결국 나는 산행 세 시간 만에 만행산 정상에 올랐다. 천황봉 표지석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얼굴은 땀범벅이지만 진심이 담긴 순간이다. 하산은 짧고 빠르다. 허벅지가 욱신거렸지만, 내려가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저녁엔 같이 템플스테이를 하면서 친해진 상현 씨와 인드라망 쉼터 카페를 찾았다. 찻잎을 덖는 녹차 향이 실내를 감쌌다. 상현 씨가 머무는 황토방에선 장작불이 타닥타닥 타올랐다. 붉은 화롯불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밤이 깊었다. 사찰을 밝히는 희미한 조명을 따라 걸으며 고개를 들었다.
인공조명 하나 없는 까만 하늘은 별들로 가득하다. 수백만 년 전의 빛이 지금 내 눈 앞에 도달했다. 마음속 무언가가 조용히 정리되어 간다. 사진으로 남기는 순간보다, 사진을 찍지 않은 순간들이 더 오래 남을지도 모르겠다. 오직 나만 알고 있는 장면들. 산사의 깊은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