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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경민 Oct 18. 2022

길을 잃어도 괜찮았던 '살타'

헤매어도 결국 그곳은 아르헨티나 살타

"생명을 계속 이어가도록 해주는 것, 그건 오직 걸음을 내딛는 거야.
한 걸음 한 걸음 언제나 다시 시작되는 바로 그 똑같은 발걸음 말이지."
-생텍쥐베리, <인간의 대지>


걷다 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나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공간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는 걸으면서 헤매기도 하겠지만 결국 무엇인가를 보게 된다. 새로운 것과 익숙한 것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걷기 위한 마음의 준비



아침이 유난히도 달콤했다. 

버스에서 가득 채운 하루가 지나니 또 다른 해가 떠올랐다. 느긋하게 조식을 먹으며 아침을 맞이한다. 아르헨티나의 크루아상은 보통보다 크기가 조금 작고 더 달달했다. '메디아 루나(반달)'라고 부른다. 커피와 함께 메디아 루나를 베어 먹으면서 독일 친구와 담소를 나눴다. 








곤경에 빠지는 건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다. 
뭔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

우리는 소화시킬 겸 중심가로 걸어갔다. 유럽풍의 건물들이 먼저 보였다. 그런데 금융 건물들이 모여있는 거리엔 은행마다 엄청나게 유명한 음식점을 기다리듯 줄이 길게 서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아르헨티나는 1916년부터 60년 동안 대통령이 22번 바뀌었다. 정치적 혼란을 겪으면서 1900년대 초에 세계 5대 경제부국이었던 이 국가는 경제 위기에 빠진다. 1970년대 IMF 개입 이후로 8차례 이상의 국가부도까지 경험하게 됐다. 잘 나갔을 때 1달러는 1페소였다. 지금은 공식환율로는 1달러는 150페소, 암 환율로는 300페소로 바꿀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돈의 가치가 몇 백배 떨어진 것이다. '올해도 좋지 않구나' 극심한 환율 변동과 암울한 표정으로 사람들이 은행에 줄을 서 있는 것을 보니 이방인인 나도 현지 상황을 알 수 있었다.


"CASH(DOLLAR) IS THE BEST"

아르헨티나는 특이했다. ATM에서 달러 인출을 금지했기에 달러 현물이 최고였다. 공식환율과 암 환율도 따로 존재했다. 공식적으로 명시된 환율이 아닌 길거리에서 "깜비오(환전)"을 외치는 사람이나 웨스턴 유니온에서 달러를 바꿀 경우엔 같은 달러를 주고 두배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예금도 꺼려한다. 이자율보다 물가상승률이 높기 때문이다. 극심한 물가상승률로 잔돈인 동전도 부족했기에 상가에선 반올림해서 지폐를 거슬러 주곤 했다. 

살타의 거리


페루와 볼리비아와는 달리 백인이 더 많은 거 같아

“왜인 줄 알아? 제일 많이 죽여서 그렇대”

그는 담담하게 설명했다. 원주민은 정부에 의해 조직적 살해되었고, 백인에 혼혈 및 동화되었다고 말이다. 현재 아르헨티나는 인구 95%가 백인이다. 


그들은 유럽을 그리워하고 가끔 스스로 유럽이라고 여기고 싶은 나라처럼 보였다. 음식도 그랬다. 이탈리아 이주민들로 인해 파스타, 피자, 와인 등을 즐겨 먹었고, 스페인 요리의 영향을 받아 엠빠나다, 또르띠야가 생겨났다. 또한 목축업이 풍부해서 유럽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스테이크를 즐기는 모습을 보였다. 


"라자냐 먹을래?"

"음 그래!"


이탈리아 음식인 라자냐를 고른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많은 선택지엔 이탈리아 음식이 있었다. 하지만 물가는 쌌다. 라자냐와 디저트인 케이크까지 먹고 만원도 들지 않았다. 

살타 어느 한 카페에서의 점심


생각 없이 걸음을 내딛기

환전, 유심, 체크아웃, 점심까지 모두 해결했다. 

편한 마음으로 밤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살타 구경을 함께 하기로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이야기를 하면서 발길이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중심지가 나왔고, 또 공원이 나왔다. 


먼저 보인 구에메스 광장엔 아르헨티나 국기들이 보였다. 하늘색과 하얀색에 독립을 의미하는 태양문장이 박혀있었다. 광장을 지나자 핑크빛 대성당이 보였다. 성당 앞에 무수히 달려 있는 오렌지 하나를 독일 친구가 몰래 하나 따서 건넸다. 그때 먹은 오렌지는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에 가장 셨다. 교복을 입고 하교하는 학생들 사이를 지나니 산프란시스코 성당이 보였다. 들락날락 거리는 사람들을 따라 자연스럽게 내부를 들어선다. 

'샌프란시스코, 샌디에이고(SAN FRANCISCO, SAN DIEGO)'

"미국 도시 지명은 교회 성인 이름에서 딴 게 많구나" 

아메리카라는 대륙은 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알고 있던 도시의 이름들도 성당이나 교회의 성인 이름인 경우가 생각보다 더 많았다. 성인의 이름을 들으면 그 사람을 떠올리는 게 아니라 도시를 떠올리며 반가워했다. 

살타 광장 / 살타 대성당 / 산프란시스코 성당


모르는 길을 헤매다가 보니 산마르틴 공원이 나왔다. 큰 호수가 있는 공원에서 노점상들이 책을 판매했다.

"나 책 한 권 사려고"

독일 친구는 책을 열심히 둘러보더니 한 권을 골랐다. 문득 나도 이번 기회에 스페인어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영어와 스페인어가 함께 쓰인 책을 한 권 집어 들었다. 


여유로운 공원을 걷다보니 둘다 어느 순간 속 얘기를 털어놓고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술술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다른 세상에 살던 둘은 서로 흥미롭게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서로를 응원했다. 

살타의 공원에서


안녕, 건강하고 언젠가는 보자!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를 타기 전 우리는 언젠가는 보자는 기한 없는 약속을 하면서 작별의 포옹을 나눴다. 무사히 비행기를 올라타서 오늘 구매한 책을 꺼냈다. 기웃거리시는 옆자리 아주머니께 도움을 청하니 살타 출신 아주머니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스페인어 읽는 법부터 알려주셨다. 우연히 산 책은 우연한 배움을 만들었다. 요즘에도 그 책이 보이면 우연에 따라 걷던 살타가 떠오른다. 언젠가는 또 가고 싶은 그런 도시였다.




처음인 도시를 그저 걸었다. 지도를 보지 않고 발길이 닿는 대로 움직인 발걸음 덕분에 많은 것을 보았다. 한 도시의 색감을 보고 느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서도 균형을 잡게 되었다. '어쩌면 헤맨다는 게 나쁘지만은 않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 특히 살타에선 더 그렇게 느껴졌다.




*살타

편안히 쉬는 장소라는 뜻의 살타는 도시 중심에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 건물들이 즐비하고 외곽으로는 협곡, 와이너리가 위치하고 있는 휴양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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