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경민 Oct 20. 2022

어느날에 문득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떠오르다

다양한 맛의 매력을 모두 지닌 도시

'문득'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갑작스레 찾아오는 생각은 설렘과 미묘한 감정을 동반하곤 한다.


공기 좋은 한강에서 라면을 먹다 보니 문득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아른거렸다.

'그랬지. 공기 좋은 건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최고였는데.'



"좋은 공기(GOOD AIR, BUENOS AIRES)"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이름의 뜻이다. 공기가 산뜻한 이 도시는 아르헨티나의 거대한 크기에 알맞게 도시도 커다랗다. 이곳에서 일주일의 시간은 짧게만 느껴졌다. 더 오래 이 도시를 만끽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 도시였다.


처음으로 한인민박에 머물렀다. 한국인이 정겨웠던 나머지 첫날밤에 도착해서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에 들었다. 이곳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작은 한국 같았다. 작은 한국과 아르헨티나를 오가면서 일주일 간 시내를 누볐다. 계속 걸어도 그 길들이 자꾸 떠올라서 또 가고 싶어졌다. 익숙해져서 머물고 싶은 도시, 그런 헤어 나올 수 없는 매력을 가진 도시였다.


"퐁당"

서브 마리노. 우유에 초콜릿을 퐁당 빠뜨려서 녹여 먹는 음료이다. 달달한 음료를 마시며 카페에 느긋하게 앉아서 멋지게만 보이던 도시에서 여유를 부린다. 단맛에서 시작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생각보다 강렬했다. 라면스프처럼 맵고 짜고 달았다. 중독적인 도시여서 자꾸 문득 떠오르곤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 서브마리노



단맛 ver) 먼저 주의사항 안내드릴게요!


"빠르게 차가 지나가니 잘 보고 다니 시구요! 일단 큰 도시니까 도난 등 조심하세요!"

"길을 물어보면 블록 단위로 말해줄 거예요. 100m마다 블록이 바뀌거든요! 자 투어 시작할게요!"


우연히 무료 워킹투어를 신청했다. 열정적인 아르헨티나 가이드를 따라 중심부를 가로질러 걸었다. 그는 길을 걸으면서 준비해온 설명들을 한다. 노동자의 영웅 에비타, 최초 탱고 카페 토르토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심장인 마요 광장, 식민지 시청과 독립선언을 한 5월 혁명, 70년대 독재정권과 실종자, 아르헨티나의 경제 등에 관한 것이었다.


아르헨티나의 다양한 시대의 건물들


"내 눈엔 저 건물이 제일 예쁜 거 같아!"

귀로 들어오는 감각보단 눈에 들어오는 감각이 더 크게 느껴졌다. 한 블록을 걸을 때마다 서로 다른 시대를 담은 건물들이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면서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다른 개성을 가진 건물들은 자유롭게 자신만의 가치를 뽐내고 있었다. 다 똑같은 간판으로 맞춰둔 일체감이 드는 거리보다 개성 넘치는 이 거리를 사랑하게 되었다. 핀란드 친구들과 캐나다 친구와 함께 자신이 생각하기에 아름다운 건물이 무엇인지 이야기했다. 각자 다른 취향을 존중하면서 웃고 떠드는 그 공간의 공기는 차갑고도 맑고 또 달콤했다. 다름의 가치를 그대로 봐주는 공간이라서 마음도 편안해졌다.


"와사삭"

엠빠나다를 입에 문다. 투어 후에 핀란드 친구들과 배를 채우러 왔다. 엠빠나다는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한 군만두와 비슷하다. 치킨 맛, 돼지고기 맛, 콘치즈맛 등 다양한 맛을 벤치에 앉아서 붕어빵을 불어먹듯 '호호' 불어 먹었다. 맨 볼에 닿는 차가운 바깥공기, 주변의 수산스러운 소리들과 다른 길거리 음식의 냄새까지 어우러져서 음식은 입에 들어갔다. 코를 훌쩍이면서 먹은 따뜻한 엠빠나다는 그 시기의 달짝지근한 기억을 담아둔 타임캡슐이 되었다.




짠맛 ver) 오늘은 탱고 수업 꼭 받을 거예요!



당찬 다짐을 외치며 민박집을 나왔다. 한인민박 사람들과는 벌써 가족 같다. 매일 거실에 모여 아침을 함께 먹으면서 일정을 같이 고민하고, 일정이 끝난 저녁에도 모여서 웃고 떠드는 활기참이 넘친다.


탱고의 뿌리인 아르헨티나에서 탱고를 배웠다. 직원은 몇 명 이상이 아니면 수업을 열어주지 않는다고 했다. '하고 싶다'라는 격한 감정은 평소에 하지 않을 일을 자처하게 했다. 나는 공연장 앞에서 티켓을 구매하는 사람들에게 탱고 수업을 홍보하면서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어떤 수업인데요?"

흥미로워하는 분께 여행객인 나의 사정까지 이야기했다. 여동생에게 물어보겠다던 그분은 흔쾌히 좋다고 이야기했다. 너무 신난 나머지 나는 주머니에 있던 얼마 안 되는 돈까지 보태주었다. 이 날은 왜인지 '꼭'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고 결국은 이 날 탱고 수업을 받고 공연도 보게 되었다.



“생각하지 말고, 그저 그대로를 느끼세요! (no thinking, just feel it as it is)”

탱고 수업을 받는 내내, 선생님께서 강조한 부분이었다. 신기하게도 정말 생각 없이 리드를 따라 느껴지는 대로 움직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춤이 완성되었다. 삶의 속도를 조금 늦추고 음악이나 상대방에게 귀를 기울이는 일. 이것이 탱고였다. 다른 잡념 없이 오로지 그 순간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 말이다.



"만약 실수를 하면 스텝이 엉키고 그게 바로 탱고죠(<여인의 향기>)"

실수도 예술의 일부로 보는 엉키고 설킨 탱고 공연은 화려하고 우아하다. 먼 나라로 희망을 가지고 이민을 왔지만 고된 노동을 하게 된 현실을 잊기 위해 시작된 탱고. 화려함 속에도 특유의 애절함이 담겨서 아직도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말이 아닌 행동뿐이라서 닿을 듯 닿지 않는 상대방인지, 저 너머에 있는 고향에 대한 향수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름다운 탱고 공연이 견뎌냈던 슬픈 현실은 짠맛이었다.


탱고 공연



매운맛 ver) 하나 둘 셋 점프!



많은 사람들은 특별한 이색 경험으로 스카이 다이빙을 버킷리스트로 넣기도 한다. 나 또한 별생각 없이 그저 인생에서 한번쯤은 해보고 싶었다. 아르헨티나에서 비교적 저렴하다는 말을 듣고 놓치면 안 될 기회라는 생각에 민박 친구를 따라갔다.


'얼어 죽을 날씨에 스카이다이빙이라니!'

덜덜 떨고 있었다. 영상을 보고 서류를 작성하고 기다린 끝에 옷을 착용했다. 이미 스카이다이빙을 한 아르헨티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잔뜩 기분이 올라가서 짜릿하고 엄청난 경험이라고 이야기한다. 오늘 생일이라던 그 친구는 최고의 생일선물이었다고 이야기하면서 헬기로 향하는 나를 응원해줬다.


'이대로 죽진 않겠지? 안전하겠지?'

헬기를 탑승한다. 헬기를 타자 빠져나올 수 없다는 생각에 떨리기만 했다. 공중으로 높이 올라갔을 때 한 명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악으로 버티고 싶었던 건 생존 본능이었으리라.


"하나 둘 셋!"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숨을 삼십 초가량 전혀 쉴 수 없었다. 바람이 주는 강력한 압박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숨이 쉬어지지 않자 곧 생사를 오간다고 느낀 눈에서는 감각 없이 눈물이 흘렀다.


"푸푹!"

낙하산이 펴지고 숨이 쉬어지자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 들이킨 차갑고도 상쾌한 공기는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다. 좁은 시각으로 바로 밑밖에 안보였던 수직하강의 순간과 달리 여유를 가지니 넓은 대지가 보였다. 여유가 있어야지 세상이 넓다는 것도 알 수 있나 보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 일상의 걱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단지 하늘의 순간을 흡수하면서 스릴 넘쳤고 숨이 멎을 것 같았던 짜릿함을 회상했다. 생사를 오간 매운맛이었다.





문득 떠오르는 그 중독적인 도시를 그리워한다.



‘인간은 그 본성상 모형대로 찍어내고, 그것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는 기계가 아니다. 그보다는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내면의 힘에 따라온 사방으로 스스로 자라고 발전하려 하는 나무와 같은 존재다.
- <자유론>, 존 스튜어트 밀-’


어렸을 때 모든 사람과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을 들었다. 이를 위해 나의 개성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감정을 존중하기보단 자신을 낮추고 타인의 생각에 주의를 살폈다.


하지만 이 중독적인 도시는 다른 관점을 불어넣어주었다.

개성을 그대로 표출했던 건물들은 '너 자신의 삶을 살아'라고 말을 건넸다. 남들에 대해 맞춰가기보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판단하며 결정하라고 말이다. 멋진 건물의 기준에 대해서도 여러 정의가 있고 각기 다른 답이 있었듯이 멋진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새로운 것들에 도전하면서 슬픔을 잊는 법도 배웠다.

현실을 잠깐 잊고 머지않아 끝날 노래에만 집중하는 탱고는 '실수해도 괜찮다면서 가끔은 속도를 늦추라'라고 말했다. 타인의 생각에 자신을 맞추기보단 잠깐 멈춰서 속도를 늦추고 느껴지는 대로 집중하라고 말이다.

명상의 한 형태인 스카이다이빙은 삶의 걱정을 씻어내고 하늘의 순간을 만끽하게 했다. 바람을 가르면서 가파르게 떨어졌고 하늘을 날던 그 순간은 삶에 대한 소중함과 여유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그렇다.

이 도시는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하면서도 가끔 울컥하게 만들며 사람을 여러모로 단단하게 만드는 도시였다.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면서 느낀 복합적인 감정들이 떠오른다.


중독적일 수밖에 없는 다양한 맛을 가진 이 도시는 미묘한 감정과 함께 또다시 문득 떠오를 것 같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좋은 공기라는 뜻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아르헨티나의 수도이자 라플라타강 하류에 있는 항구 도시이다. 



이전 16화 길을 잃어도 괜찮았던 '살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