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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경민 Oct 25. 2022

남미 여행의 끝, 마지막을 마주해야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되새기기

고생했어요 드디어 끝이네요

불현듯 스테이크를 먹은 후 산책을 하던 거리가 떠오른다.

나시오네스우니다스 광장 옆에는 역사적 건물처럼 웅장하게 생긴 로스쿨이 존재했다.


"저 변호사 되었어요!"

그는 행복한 표정으로 눈 스프레이를 온몸에 뿌린 채로 양손에 폭죽을 들고 있었다. 그의 퍼포먼스는 오랜 수험생활의 끝이자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고 있었다.


"사진 같이 찍어요"

그는 손짓했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사진을 찍으며 축하의 말을 건넨다. 그런데 한 분이 그에게 귓속말을 하더니 울먹였다. 그도 눈물을 감춘다. 어떠한 말은 그에게 눈물을 짓게 했다. 예상치 못한 장면을 목격하자 혼란스러웠다. 기쁨의 감정이 가득 찰 것 같은 수험 생활의 끝. 그가 한 말이나 그가 보인 눈물의 의미를 종잡을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나에게도 끝이라고 믿던 때가 있었다

수능이 끝나던 날. 복잡한 감정이 온몸을 휘감았다.

마지막 시험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수험 기간에는 견디기 힘들 때마다 '마지막'과 '기회'라는 말을 붙이면서 의욕과 용기를 북돋았다. '마지막'은 이 고통이 영속적이지 않고 일시적이라고 믿게 했기에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수능이라는 끝을 잘 마무리하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마지막과 끝은 중요하고 비장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나 또한 끝을 마주하니 후련하지만은 않았다.


여행에도 끝이 왔다.

여행의 끝에서 복잡한 감정과 함께 좋아하는 거리를 다시 걸었다. 마지막은 다시 현실이라는 출발지로 돌아가게 할 것이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건 막막하고 두려웠다.


끝을 맞이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마지막이니까 다시는 못 본다는 마음으로 새로운 것들을 찾아 나서거나 좋아하게 된 곳들을 다시 되새기는 것이다. 이번에 나는 후자였다. 갔던 곳들의 추억을 되새기면 복잡한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여운은 가시지 않았고 미련이 남았다.


한인민박에서 같은 고향 출신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과 오월의 광장부터 오벨리스크를 걸친 아르헨티나의 중심부를 함께 걸었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길거리에서 물건을 사고팔면서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나에게는 마지막 날이라도 그들에게는 생활이니 말이다.


커피숍에 들어가 여유를 부린다. 달달한 초코파이 같은 알파호르와 함께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신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한 뭉터기의 간식들을 기념품이라는 명목 하에 구매도 한다.



'저거 맛있었는데, 그때 좋았는데!'

기억의 파편들이 존재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추로스와 초콜릿을 사 먹으니 시장에서 친구와 초콜릿을 나눠 먹으며 장난치던 장면이 떠올랐다. 좋았던 추억이 떠오르자 끝이 더 두려워졌다. 하지만 이별에 익숙해져야 했다. 시작과 끝이 자연스럽게 되도록 연습해야 했다. 끝이 두렵다고 시작을 못하고 과거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친구가 말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 있대! 가볼래?"

"그래? 서점이 어떻게 아름다운데?"

추억에 젖어있던 나에게 화제를 돌려주었다. 서점은 제 기능인 책을 사고파는 행위만 이루어지면 된다. 그런 서점을 아름다움으로 순위를 매겼다니 의문이 피어올랐다.


"오페라 극장을 서점으로 바꿨대"

기능을 바뀐 서점은 오페라 극장의 웅장함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관중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책들이 가득 차 있었고, 공연이 이루어져야 할 무대에는 카페가 있었다. 오페라는 이루어지지 않지만 책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사람들은 공연이 아닌 또 다른 이야깃거리를 찾는 듯했다. 또 다른 새로움은 잠깐 동안 미련한 마음을 잊게 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스멀스멀 감정이 올라왔다. 

저녁을 먹을 때였다.


"이게 마지막 스테이크라니"

팔레르모 거리에서 저녁을 먹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매일 스테이크를 먹었다. 끝까지도 미련하게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화제를 돌리며 다른 생각들로 머리를 채워보려고 했다. 종이가 깔린 식탁에는 낙서를 할 수 있는 색연필이 존재했다. 뚜렷한 취향이 없어 보이는 백색 도화지에 요란한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이상하고 해석할 수 없는 그림들로 색을 채워나갔다.


이 날따라 마지막이란 생각에 잠도 오지 않았다. 한인민박에서 이제껏 있어도 사용하지 않았던 노래방 기기를 켰다. 노래는 마지막에 대한 허전함을 채워주고 저녁을 외롭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정리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별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마음을 풀고 정리하는 시간보다는 이별이란 단어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마지막은 아련했다.

양치를 할 때, 거울을 볼 때, 짐을 바라볼 때, 잠을 자려고 할 때.

불현듯 여행할 때의 추억들이 머릿속에 피어오르면서 감정을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다.


여행이 끝나고 며칠간 일부러 사진을 정리하지도 다시 보지도 않았다. 수능이 끝나고 몇 시간 동안 채점을 매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일종의 회피였다.


몇 달이 지나 글을 쓰겠다면서 사진을 정리하고 일기를 다시 펼쳤다.

낯선 길 위의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겪은 휘황찬란한 감정들을 정리하니 여행으로 인해 달라진 생각들이 보였다. 이번 일상은 여행으로 인해 좀 다르게 시작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피해왔던 과거는 생각과 달리 견딜 수 있는 무게였고 진중하게 마주하고 정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변호사의 눈물도 다시 떠올랐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공부의 끈을 놓지 않고 변호사가 된 것은 '마지막 시험'으로 묻어둔 꿈이 고개를 내미는 일이었다. 그의 과거의 복잡한 감정들과 노력들에 대한 수고로움을 귓속말로 공감해준 게 아닐까 싶었다. 변호사로서의 삶이 시작하기 전의 챕터에 존재하는 마지막 시험을 향했던 치열함을 다시 들여다본 것이다.


수능이라는 마지막과 끝도 전부가 아니었다. 더 큰 차원에서 또 다른 서사로 이어졌다. 끝에 대한 상상은 결국 지속에 대한 상상과 연결되었다. 삶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았고 공부는 계속되었다. 삶이라는 책은 계속 쓰였고 마지막이라고 굳게 믿었던 거대한 시험은 그중 한 챕터가 끝난 것에 불구했다.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여행이 끝나도 인생은 계속되었고 남미 여행이라는 한 챕터만이 마무리된 것뿐이었던 것이다.





여행을 마무리하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무언가를 얻게 되었고 그것들은 인생에 변화를 일으키곤 했다. 이번 남미 여행은 하고 싶었던 것들을 깨닫게 했다. 새로운 언어인 스페인어를 조금씩 배우게 했고 바쁨에서 잠시 멀어져서 차분하게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글을 쓰게 만들었다. 나 자신을 깨닫게 하면서 마지막을 대하는 자세를 바꿔주었다. 회피가 아니라 다시 들여다보고 정리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또 다른 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렇다. 여행은 언제나 나에게 새로운 것을 주는, 그런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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