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댓말에 대하여
소망이(첫째 딸의 태명) 네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거야. 수영 뒷바라지 하느라 문화센터에 열심히 다닐 때였지. 별로 친하지는 않았던 소망이 친구 엄마가 어느 날 탈의실에서 엄마한테 묻는 거야.
"소망이는 존댓말을 어쩜 그렇게 잘 가르쳤어요? 너무 예뻐요."
깜짝 놀랐지. 엄만 존댓말 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거든. 생각해 봤어. 너희들이 존댓말을 하게 된 까닭을.
엄마, 아빤 소개로 만났잖니? 뭐 그리 좋았는지 만난 지 5개월 만에 결혼했단다. 아빠가 항상 얘기하잖아. 연애 기간이 길었으면 결혼 못했을 거라고. 아빠의 정체가 다 탄로 나서 엄마가 도망갔을 거라나? 어느 정도 동의해.^^ 연애 기간은 짧았지만 매일 만나다시피 했지. 만난 지 얼마 안 되어서도 우린 어떤 가정을 꾸릴 지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던 것 같아. 그 이야깃거리 중에 존댓말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어. 아빠랑 엄마랑 사실 동갑이잖아? 아빤 항상 빠른... 어쩌고 하면서 오빠라고 주장하지만... 우린 존댓말을 사용하기로 했어. 20년 넘게 함께 산 지금은 세월이 많이 지나 풍화작용으로 인해 존댓말이 많이 깎여나가 반말에 가까워지긴 했지? 하지만 그때 우린 비장한 마음으로 존대를 하기로 했어. 호칭은 '여보'. 신혼여행 다녀와서는 친정에서 하룻밤을 지내는데 우리가 서로 '여보'라고 부르는 걸 보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이모들이 '어머! 쟤네 왜 저래?'라는 눈으로 쳐다보셨어. ㅎㅎㅎ 중간에 바꾸는 건 어려울 것 같아 어색하지만 시작을 그렇게 하기로 했지. '오빠'로 시작한 사람들은 반백살 넘어서도 '오빠'라더라.
그렇게 시작된 거야, 우리의 존댓말은. 그리고 너희의 예쁜 입술에 전해졌더구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게 삶의 힘인 것 같아. 너희에게 존대를 가르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뿌듯함으로 다가오기보다는 좀 두렵다는 생각으로 다가왔어. '아이들에게 나의 삶은 100% 노출되어 있고 내가 교과서이구나.' 이 엄청난 부담감이 엄마를 엄마 되게 하는 힘이라는 생각도 든다.
존댓말의 유용함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어. 첫 번째 좋은 점은 부부싸움 할 때. 말을 높인 상태에서 하는 싸움은 발톱을 숨긴 채 솜방망이를 휘두르는 거나 마찬가지란다. 툭툭 치긴 하겠지만 생채기가 크게 남지는 않을 거란 얘기지. 예를 들어 '너는 왜 말을 그따위로 하냐?'를 존댓말로 바꿔보면 '당신은 왜 말을 그렇게 해요?' 정도가 될 거야. 쿠션감이 있지? 엄마 아빠도 부부싸움 많이 했잖아. 그런데 존댓말을 하면 선 넘는 발언은 안 하게 되더라. 존댓말이라는 말의 그릇이 분노, 저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잘 담지 못하는 거야. 그래서 좋아. 너희도 꼭 너희의 남편님들과 존댓말을 쓰렴. 근데 소망이가 현남친에게 여보라고 부르는 걸 상상하니까 위가 간질거리는 느낌이다~~ㅎㅎㅎ
두 번째로 좋은 점은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을 때 나타나지. 위에서 말했던 소망이의 친구 엄마 있지? 그 엄마가 소망이 칭찬을 하며 덧붙인 말이 있었어.
"위로 언니가 있는데 걔가 사춘기가 되니까 존댓말 안 가르친 게 너무 후회가 됐어요. 반말로 저한테 빽 소리를 지르는데 저 단전에서부터 화가 올라와 뒷목 잡겠더라고요."
알겠지? 존댓말은 김정은도 무서워한다는 중2의 살벌한 발언도 약간(진짜 아주 매우 약간) 순화시켜준단다. 기쁨(둘째 딸의 태명)이 너 생각나니? 미대 입시 준비하며 극도로 예민했을 때 가시 돋친 말들 많이 했었잖아. 그때 존댓말을 사용했는데도 엄마 맘에 멍이 엄청 들었었는데 만약 네가 엄마에게 반말로 공격했다면 엄만 KO 당했을 게 뻔하다.
말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라는 말 많이 들어봤지?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은 마음이 예쁘다고 볼 수 있어. 엄마 아빤 서로를 존중하자는 의미에서 존댓말을 사용했는데 그게 너희에게 귀한 유산이 된 것 같아 참 감사하다. 너희도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면 꼭 배우자와 이런 약속을 하면 좋겠다. 그게 처음엔 어색하지만 금방 적응되거든. 무엇보다 너희의 아이들에게 예쁜 말그릇을 선물해 주는 일이니 고민할 필요 없겠지?
그렇다고 엄마가 늘 말을 예쁘게 했냐... 돌아보니 부끄럽다. 앞으로 더 예쁘게 말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