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프리츠커상을 수상할 그날을 기다리며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1979년 미국 건축가 필립 존스를 필두로 매년 인류와 건축 환경에 지속적이고 의미 있는 공헌을 한 생존 건축가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2016년까지 40명의 수상자(공동 수상자 포함) 중 한국인은 없다. 이웃 일본은 1987년 단게 겐조(丹下健三)부터 2014년 반 시게루(坂茂)까지 7명이 수상했다. 중국도 2012년 왕수(王澍)가 수상했고 1983년 수상자인 중국계 미국인 이오 밍 페이(貝聿銘)까지 포함하면 2명이다. ‘프리츠커 프로젝트’는 이 땅에서도 그 첫 수상자가 나오길 바라는 염원 아래 그 씨앗이 되고 단초가 될 건축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2017년 1월 한 잡지에서 연재되기 시작한 ‘프리츠커 프로젝트’의 첫 대목입니다. 2020년 4월까지 40개월간 39개 건축 작품을 소개했습니다. 이 책은 그중에서도 인상 깊은 건축작품 21개(하나로 묶어 소개한 경북 영주 실내수영장과 대한복싱훈련장을 각각 계산)를 고르고 사진작가 포스트픽이 새롭게 촬영한 사진(일부는 건축가 제공 사진)과 새롭게 다듬은 글을 묶었습니다.
2020년 현재 총 47명의 프리츠커상 수상자 중 한국인은 한 명도 없다는 점은 여전합니다. 다만 일본이 2019년 이소자키 아라타의 수상으로 미국과 공동으로 최다 수상국(8명) 반열에 올랐다는 차이가 더해졌습니다. 그러자 국내 언론에선 호들갑스러운 뉴스를 쏟아냈습니다. 필자가 보기엔 ‘사촌이 땅을 사니 배가 아프다’에 가까웠습니다.
프리츠커상은 국가에 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주는 겁니다. 따라서 이를 올림픽 메달처럼 국가 간 경쟁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민망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과학과 예술이 종합된 건축 분야 최고 권위 상의 수상자 중에 한국 출신 건축가가 한 명도 없다는 점은 분명 곱씹어 봐야 할 일입니다. 왜 한국 건축가는 프리츠커상 후보로도 거명되지 못할까요?
필자는 건축을 전공하지 않았습니다. 프리츠커 프로젝트를 연재하기 전까지 건축 관련 분야의 글을 써본 적도 없습니다. 다만 문화부에서 오래 일하면서 한국인에겐 전민미답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문화 분야 3개 상의 하나로 주목해왔을 뿐입니다. 노벨문학상, 칸 영화제 황금야자상 그리고 바로 프리츠커상입니다.
이중 황금야자상은 2019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수상으로 드디어 족적을 남기게 됐다. 영화가 상대적으로 젊은 예술장르인 데다 한국인들의 남다른 영상 문화 사랑이 일궈낸 쾌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노벨문학상과 프리츠커상 수상의 영광은 여전히 요원해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영화와 달리 문학과 건축 오랜 역사와 전통이 온축돼야 꽃을 피우는 장르이기 때문입니다.
3개 상 중 한국인의 뇌리에 가장 깊이 박혀 있는 상은 노벨문학상일 겁니다. 한국인이 예로부터 문학을 사랑하고, 한국어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데다 물질적 국력에 상관없이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아마도 3개상 중 한국인 수상자가 가장 늦게 나올 상이 노벨문학상입니다.
한민족의 역사가 반만년을 자랑한다지만 전 국민이 본격적으로 한글로 문학작품을 쓰고 비평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광복 이후부터입니다. 80년이 채 안됐습니다. 반면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같은 국가에선 15세기 르네상스 시대부터 자국어로 글을 쓰고 비평하는 문화가 확립됐습니다. 500년의 세월입니다. 게다가 국민 1인당 영화 관람 편수는 세계 1위를 달리지만 국민 1인당 독서량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 중 꼴찌를 다투는 마당에 언감생심(焉敢生心) 아니냐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프리츠커상 수상이 어려운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건축은 ‘돈 되는 부동산’ 아니면 ‘튀는 외장 인테리어’ 둘 중 하나였습니다. 돈 되는 부동산이 초래한 참상이 ‘성냥갑 아파트’라면 튀는 외장 인테리어가 빚어낸 촌극이 국적불명의 싸구려 키치(kitsch) 건축의 남발입니다.
좁은 땅에 최대 면적을 확보하는 길은 딱 하나입니다. 손실되는 면적 없게 무조건 사각형으로 짓고 최대한 쌓아 올리는 겁니다. 천편일률적인 아파트가 유독 한국에서 각광받는 이유입니다. 그로도 부족하다 싶으면 테라스, 발코니, 옥탑방 같은 따개비를 더덕더덕 붙이면 됩니다. 그러다 보니 ‘미관’이니 ‘경관’이니 하는 용어가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건축문화가 발달한 나라 사람들 눈에 그런 건축이 어떻게 비칠까요?
뒤늦게 미관과 경관에 눈을 뜨더라도 주변과 조화나 건축적 맥락을 모르면 눈에 들어오는 게 ‘인테리어’이고 그 인테리어의 외부 확장에 불과한 ‘나 홀로 예쁜 건축’입니다. 좀 더 혹독하게 말하자면 ‘공주병 걸린 건축’입니다. 고도성장이 정점을 찍은 뒤인 1980년대 이후 한국에서 유행한 유럽 스타일의 성채나 풍차, 통나무집 같은 국적불명의 건축이 우후죽순으로 지어진 이유입니다. 지금 그 건축을 다시 찾아보십시오. 낯 뜨거워서 얼굴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건축이 예쁜 배경으로만 머물 때 싸구려 키치를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풍토에서는 결코 좋은 건축이 나올 수 없습니다. 아무리 천재적 건축가가 나온다 하더라도 그걸 알아보고 수용해주는 건축주를 만나지 않는 한 멋진 건축이 탄생할 길은 요원합니다. 건축 문외한에 가까운 필자가 겁없이 ‘프리츠커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언젠가 프리츠커상을 수상할 만큼 걸출한 후보작을 선정해 소개하겠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다만 '성냥갑' 아니면 '키치'만 눈에 익은 독자들에게 ‘낯설지만 좋은 건축’의 다양한 사례를 보여주자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저 멀리 바다 건너 건축'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의 건축’ 중에서 의미 있는 작업을 보여주면 일상에서 건축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지 않을까? 그렇게 건축을 바라보는 대중의 관점이 바뀔 때 프리츠커상 수상자가 탄생할 수 있는 예술적 생태계도 조성될 수 있지 않을까?
기존 건축기사와 차별성을 위해 좋은 건축가의 대표작을 여럿 소개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직 건축작품 하나에만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래서 그 건축의 다양한 면모를 다양한 사진으로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글은 오히려 그런 그림을 쫓아가며 설명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한마디로 프리츠커 프로젝트의 주인공은 ‘좋은 건축 작품’입니다. 이런 점은 건축가 개인에 초점을 맞춘 프리츠커상의 취지와 다른 점입니다. 그래서 책에 싣는 작품을 선정할 때도 설계자가 아니라 건축 자체의 의의에만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러다 보니 두 점 이상의 작품이 실린 건축가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더 훌륭한 건축가라는 평가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둡니다.
프리츠커 프로젝트는 그렇게 한 그루의 나무를 심어 가는 식으로 진행됐습니다. 하지만 그 취지는 한 그루의 멋진 나무보다 그 나무를 자라게 해 준 숲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다 좋은 나무가 자라더라도 그걸 귀히 여기고 다른 잡목들 때문에 햇빛이나 물을 충분히 받지 못해 고사하는 것을 막아내야 멋진 숲이 이뤄진다는 것을 일깨우고 싶었습니다.
이 기획을 진행하면서 의외로 한국에도 좋은 건축가가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의 진가와 진심을 알아주는 건축주는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그들 건축가 중에 프리츠커상 수상자가 나올까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그들의 고군분투로 탄생한 건축이 미래의 그 수상자를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될 것임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