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꿈 방문자 22화

은혜의 결단

by 하늘위로

지선의 상태는 단순한 기절이었을 뿐, 몸 상태에 특별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기절하면서 여기저기 쓸린 자국은 있었지만, 벽에 기대어 천천히 쓰러진 덕에 큰 부상은 면했다. 행인들의 빠른 신고 덕에 2차 사고도 당하지 않고 곧바로 응급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런 걸 보면,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다.


하지만, 은혜는 기절의 이유에 집중했다. 지선은 왜 기절을 했는가?


그 이유는 극도의 긴장과 스트레스, 그리고 공포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엄마를 죽인 자를 보고 있다는 게 지선에게 트라우마처럼 강한 충격을 준 것이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땐, 트라우마가 다가올 여유조차 없었다.


왜, 그가 아무렇지 않게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지? 어째서?


놀람과 분노의 감정에, 다른 감정들이 끼어들 틈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직접 벌하기로 생각하고 다시 찾아갔을 때 지선은 생각지 못한 여러 가지 감정들에 의식이 삼켜지고 말았다. 아이에게 엄마의 죽음은, 그 자체로 트라우마가 된다. 전부를 잃은 것이다. 자신의 세상을 무너뜨린 당사자가 바로 10m 전방에 있다. 어른이 되었다고 한들 의식 깊은 곳에 단단히 박힌 상처는 언제든 불쑥 모습을 드러난다. 공포감. 그래, 지선은 그가 무서웠다.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고 떨렸다. 지선은 그때 그 나이로 돌아가 두려움 속에 갇혔다.


은혜는 지선의 감정을 지켜보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이불 끝자락만을 매만지고 있는 지선은 은혜가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본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은혜는 지선이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지선이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애착 인형 하나와 지선이 늘 힘이 되었다고 말한 20년 전 본인이 지선에게 쓴 엽서 한 장을 놓고 지선의 꿈에서 빠져나왔다.


은혜가 누군가의 꿈, 의식 속에 들어간 건 처음이다. 은혜와 지선이 서로 우호적인 데다 지선 역시 몇 번이고 은혜의 꿈속에 들어간 탓인지, 둘 모두에게 아무런 충격도 없었다. 의식의 작은 흔들림조차 없을 정도. 그래서 더욱 지선이 은혜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지금은 아무렇지 않지만 초반에 지선이 은혜의 꿈에 방문했을 땐 둘 모두 작은 울렁임을 경험했다. 타인의 꿈에 방문하는 일은 자신의 존재를 들키거나 거부당할 수도 있다.


은혜는 지선의 두려움을 똑똑히 보고 돌아왔다. 그래, 어쩌면 은혜 자신도 이렇게 될 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은혜는 눈을 감았다. 의식 속에서 튼튼하고 가느다란 긴 줄을 펼쳤다. 그것은 은혜의 무기였다. 은혜는 지선 몰래 매일 조금씩 자신의 무기를 만들고 단련시키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쓰일지는 모르겠지만, 지선이 위험에 처하면 그가 누구든 포박시킬 수 있는 단단한 줄이다. 필요에 따라 공격도 가능하다. 그것은 위기시 지선의 탈출을 도울 것이다. 은혜는 언제든 뛰어들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은혜는 결심했다. 그의 꿈속을 방문하는 건 내가 먼저야, 그게 순서에 맞아.


생각을 마친 순간, 문득 은혜는 지선의 아빠, 경석이 떠올랐다.


'이렇게 될 줄 오빠는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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