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봄

by 하늘위로

할머니에겐 매 계절이 참 좋은 계절이었다. 봄엔 알록달록 예쁘게 피어나는 꽃들과 초록으로 피어나는 싹들에 즐거웠고, 해마다 꼭 새로운 작물들을 발견해 심는 기쁨도 있었다. 여름엔 선풍기 틀고 마당에 앉아 둘이서 옥수수며 감자며 수박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가을은 단풍놀이 겸 가보지 못한 지역을 찾아 떠났다. 이름도 없는 산 아래 아주 작은 마을에서 1박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겨울에는 가급적 외출을 많이 하지 않았는데, 함께 드라마를 보면서 화롯불에 군고구마며 군밤을 굽고 뜨거운 차를 호호 불어 마셨다. 부부는 일생 해외여행 한 번 가본 적 없었지만, 소소한 일상을 늘 감사하게 여기며 살았다. 계절마다 나오는 작물들을 이웃과 나누면, 또 그릇 가득히 정이 담겨 돌아왔다. 이렇게 이 집에서 10년, 20년... 해가 쌓일수록, 행복이 늘어났다.


할아버지 없는 계절은, 혹독했다. 같이 보낸 시간이 켜켜이 쌓인 이 집에서 하루 매시간 매초가 고역이었다. 여름의 끝에 그렇게 할아버지를 잃고, 병원, 경찰서, 법원... 분주히 방문하며 정신 차려보니 가을도 저물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장례는 할아버지 본인이 생전에 꼼꼼히 준비해둔 덕에 순조로웠다. 이 나이쯤 되니 가족이라곤 먼 친척을 제외하곤 부부밖에 없었지만. 할아버지를 찾아오는 이들은 그래도 꽤 많았다. 가까운 이웃부터 옛 직장 동료들, 친구들, 지인들... 살아있는 분들은 기꺼이 와주었다. 예상할 수 없는 비극적이고 원통한 죽음이었지만, 할아버지를 추억하며 도란도란 국밥 한 그릇을 먹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할머니는 그래도 참 다행이다, 다행이다 했다. 할머니는 겨울 내내 할아버지를 추억하며 보냈다. 저녁을 준비하고 있으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꼭 그가 다시 돌아올 것만 같았다. 집안 곳곳에 추억은 얼마든지 있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할아버지가 있었다. 혼자 밥을 먹으며, 맞은편에 할아버지의 밥과 수저를 놓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이웃들은 할아버지 생전보다 더 자주 찾아왔지만, 할머니는 웃음을 잃었고, 이젠 가짜 웃음을 지어야 하는 것도 고역이 되었다. 서서히 모든 것을 단절해갔다. 그나마, 계절이 겨울이어서 버틸 수 있었다. 문을 꽁꽁 닫고, 드라마를 봤다. 마치, 옆에 할아버지기 있는 것처럼 겨울을 보냈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할아버지 없는 사계절의 마지막이 왔다. 꽃들은 피지 않고 싹도 나지 않고, 새 작물을 심는 일도 없었다. 물 한 모금 얻어먹지 못한 식물들은 봄이 왔음에도 좀처럼 깨어나지 못했다. 할머니는 따뜻한 햇살이 서러웠다. 마당에 우두커니 앉았다. 그래, 이제 더 이상 할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아. 할머니는 삶을 잃어버렸다.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나무처럼 말라갔다. 몸도 마음도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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