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학적 소비 5
월세를 살다가 대출을 활용해 전세로 갈아타고 월세를 아끼는 경우, 즉 대출 이자가 월세보다 적어 전세로 전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대출은 평생 받지 않는 게 좋다. 대출은 우리의 소비 습관을 망가뜨리고, 더 나아가 대출 자체가 습관화된다. 없으면 안 사고, 안 쓰는 게 좋다.
최근 집값이 크게 오른 것에 많은 사람들이 허망해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아직 차익 실현도 하지 않은 상태다. 예를 들어, 5억 원짜리 집을 2억 원의 자기 자본과 3억 원의 대출로 산 뒤 집값이 10억 원이 됐다면, 5억 원이나 오른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팔아서 현금화한 뒤 전세 등으로 이사한 경우'에만 해당된다. 이런 경우는 드물다. 반대로 경제위기나 부동산 하락장이 오면, 집값이 3억 원까지 떨어질 수도 있다. 이 경우, 집주인은 평생 모은 2억 원을 날리고, 은행 빚 3억 원과 막대한 대출 이자만 남게 된다.
18년간 글로벌 금융회사에서 일하며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과 '전투' 같은 상담을 해왔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은, 거의 80~90%의 사람들이 대출을 습관처럼 사용한다는 것이다. 대출로 망가진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았다. 그러나 대출을 쓰지 않으면서 망한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이렇듯 승자는 늘 거북이였다. 빨리 가려다가 언젠가는 넘어진다. 거북이는 천천히 가지만 결국 가장 먼저 결승점을 통과한다.
카지노를 떠올려 보자. 5배를 벌게 되는 운이 좋은 날로 가정해 보자. 100만 원을 가져가서 5배를 벌게 되면 500만 원을 벌 수 있지만, 만약 자기 자본 100만 원에다가 900만 원의 대출까지 더해서 총 1000만 원을 투자했다면 5000만 원을 벌었을 것이다. 엄청나 보이지 않는가? 하지만 해서는 안된다. 이 사람이 5000만 원을 벌고 다시는 도박을 하지 않는다면 성공한 이야기로 끝나겠지만, 그게 가능하겠는가? 결국 대출을 자주 사용하면, 언젠가 감당하기 힘든 큰 위기에 빠지게 된다. 대출, 즉 남의 돈은 무서운 것이다.
할부도 우리의 소비 관념을 흐리게 만드는 주범이다. 무이자 할부도 마찬가지다. 무이자 할부라면서 대부분은 일시불로 결제했을 때 할인 혜택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100만 원짜리 물건에 110만 원의 가격표를 붙여놓고는 "무이자 할부"라고 팔고 있지만, 일시불로 결제할 경우 10% 할인해 주는 식이다.
모아서 사자. 할부는 이자까지 내지만, 돈을 모으는 동안에는 오히려 이자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모으는 긴 시간 동안 ‘이걸 정말 사야 하나?’라는 의문이 들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물건을 아예 사지 않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대성공이다. 만약 할부로 10개의 물건을 산다면 지금 당장 구매가 이루어지겠지만, 돈을 모아서 사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이 지나면 결국 3~4개만 구매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물건의 필요성을 재차 검토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들게 돈을 모았으니, 불필요한 물건보다는 정말 필요한 것만 사게 되는 것이다.
렌털도 할부와 마찬가지다. 우리 집에서 사용하는 정수통은 2만 원대다. 유럽에서 꽤 유명한 제품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다. 몇천 원짜리 필터만 몇 달에 한 번씩 교체하면서 잘 쓰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정수기 가격을 알고 있는가? 약 4천만 원에 달한다.
왜 그럴까? 매달 3만 원씩 렌털료를 내고 정수기를 사용한다고 가정해 보자. 5년이나 10년마다 업체에서 새 정수기를 권할 것이다. 어쨌든 매달 3만 원의 비용은 꾸준히 들어간다. 제휴 카드 할인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제휴 할인도 결국 일정 금액 이상의 카드 사용이 필요한데, 다른 카드사에서도 받을 수 있는 혜택 정도이다.
30세에 독립해서 80세까지 50년 동안 정수기를 사용한다고 가정해 보자. 매년 36만 원씩, 50년이면 총 1800만 원이다. 이 금액에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만약 매달 3만 원씩 정수기 렌털료 대신 은행에 적금을 넣는다면 어떻게 될까? 금리 3%로 가정하고, 이자 소득세는 계산하지 않겠다. 50년 동안 약 1350만 원의 이자가 발생한다. 여기에 복리가 붙으면 약 2378만 원이 된다. 이 금액은 이자만이고, 원금 1800만 원을 더하면 총 4178만 원이 된다. 이렇게 큰 금액이 우리의 인생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정수기 렌털의 예시일 뿐이다. 더 다양한 종류의 할부, 렌털, 대출을 이용한다면 수억 원에서 수십억 원이 평생 동안 연기처럼 사라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합법적인 덤터기다. 한 정수기 업체가 20여 년 전 '렌털' 제도로 대박을 터트리자, 많은 제품들이 이 '렌털' 시스템을 도입해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안마 의자, 침대, 가전제품, 심지어 타이어까지도 렌털의 범주에 들어왔다. 이런 대기업들이 계산에 약한 대중들을 상대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상업적인 마케팅을 하는 것은 아닌지, 내 눈에는 그렇게 보여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