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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Aug 28. 2021

아이들의 한 달은 변화와 성장의 시간

한 달이라는 시간은 나 같은 40대보다는 9살 인생에게 더 많은 역사를 만들어주는 시간이다. 키가 훌쩍 크기도, 살이 조금 통통하게 오르기도, 까맣게 그을리기도, 미처 못 자르고 온 머리가 덥수룩 해지기도, 짧은 단발머리를 길러 어느새 양갈래로 묶음 머리가 되기도 하는 시간이다.

그렇게 여름방학 한 달은 아이들에게 변화와 성장의 시간, 유년의 기억을 간직한 채 물러가는 썰물 같은 시간이다. 먼 훗날 겹겹이 쌓인 나이테를 안고 돌아을 때 아이들은 9살의 여름방학 어떤 빛깔이었는지 기억할 수 있을까.


한 달 동안 몸 곳곳에 배인 게으름을 털어내느라 힘들었을 개학날, 등교 시간을 맞추느라 아이들의 아침은 꽤 부산스러웠을 것이다. 늦잠을 자느라 아침밥을 거르진 않았는지, 엄마가 깨웠어도 다시 잠드는 바람에 야단맞지는 않았는지, 오랜만에 이른 시간에 찾아온 '아점' 아닌 '아침' 식사가 목으로 잘 넘어갔을지.


각자 아침은 저마다의 분주함으로 소동이었을지 모르나 등교한 아이들의 모습은 해사했다. 한 달만에 듣는 아이들의 "선생님~!" 소리 반다. 4단계 거리두기쯤은 가뿐히 무시하고 친구를 향하여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현하는 아이들의 천진함이 부럽다. 방역수칙을 위해 그 즐거움을 기어코 헤집어 놓아야 하는 역할은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 하는' 일이다. 해야만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의 간극은 멀기만 하다.


좋은 날을 추억하는 일은 그날의 설렘과 행복한 순간을 다시 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의 추억의 순간을 기억하기 쉽도록 개학 전날 칠판에 이미지 프리즘 카드를 붙여두었다. 교실에서 하루를 꼬박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했던지 사진들은 배배 꼬 오그라져 있었다.


이미지 프리즘 카드. 여러분들의 지난 여름은 어떤 사진의 모습인가요? by 그루잠


아이들과 방학 동안 있었던 일과 관련된 사진을 1~3개 골라 '방학 지낸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닷가나 물놀이 사진이 제일 많이 선택될 줄은 예상했지만, 의외의 사진을 고른 아이들도 있었다.


한 아이가 방 안 구석에 혼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아이 사진을 선택했을 때, 아이의 방학이 어떤 슬픈 이야기일까 봐 순간 걱정이 되었다. 오빠랑 말다툼으로 화가 나서 혼자 방 문을 닫고 화를 식혔다는 말에 안도했지만. 축구에 살고 축구에 죽는 기찬(가명)이가 나왔을 때 난 기찬이가 축구공이 그려진 사진을 고르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진 앞에서 살짝 선택 장애를 겪는 듯하여, "이거?" 하며 축구공 사진을 짚어주었는데 고개를 저었다. 이 날이 기찬이가 경험한 것을 소개하는 말을 할 때 축구를 언급하지 않은 첫날이었다. 아이들의 한 달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는 시간임에 틀림없다.


아이들이 방학 동안 쓴 글쓰기 공책을 통해 아이들의 방학생활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코로나 상황에도 가족과의 소소한 여행 이야기는 글마다 눈에 띄었지만, 소확행 이야기가 더 많았다. 아이들의 엉뚱발랄순수천진 스토리는 항상 나를 미소 짓게 한다.


나는 놀던 중에 선생님께 물었다. "일광욕은 햇빛으로 하는 거고 만약 월광욕이 있으면 달빛으로 하는 거예요?" 선생님께서 "그런가?" 하셨다. 나는 밤에 방에서 커튼을 열고 월광욕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광욕? 월광욕?>이라는 제목의 가희(가명)의 글 내용이다. 가희는 어떤 선생님과 이런 신나는 이야기를 나눴던 것일까. 가희가 이렇게 기발한 이야기를 하는 순간에 함께 한 그 선생님이 부럽다. 가희는 진짜 밤에 커튼을 열고 월광욕을 했을까?


가희는 다음과 같이 친구에 대한 명언도 글로 남겼다.

친구 00 이가 00 이를 오랜만에 봐서인지 나는 신경도 안 썼다. 나는 너무 기분이 상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치, 나랑은 단짝 하자고 해 놓고서.' 그래도 같이 놀 친구 00 이가 있어서 다행이다.
(중략)
만약 그 친구까지 놓치면 속상할 테니, '소 잃고 외양간 고치다'처럼 되지 않도록 00에게 잘해줘야겠다.


내 옆에서 나에게 정성을 쏟는 친구의 소중함을 이토록 잘 깨닫다니.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경험이 있는 어리석은 나에게는 오늘 가희의 문장이 공자님 말씀보다 더 와닿는다. '단짝 하자'는 친구의 말은 가끔 모래알처럼 바스스 흩어지곤 한다. 단짝이 '단(지 이번 한 번만)짝'이 안 되려면 상대에게 공들여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의 말씀. 

과거의 나의 단짝 친구야, 우리 흰머리보다 까만 머리카락이 더 많을 때 얼굴 보자. 이제 얼굴 잊어 먹겠어. 어느 날 할매가 되어 서로에게 기함하는 너와 나를 상상하니 그건 좀 아니다 싶다.


오늘은 엄마가 회사 간 날이었다. 엄마 첫 회사 가는 날인데 걱정이 된다.


<걱정되고 보고 싶은 날>이라는 제목으로 쓴 민정(가명)이의 글이다. 20여 년이 넘는 교직 생활 중 아이 건강 문제로 6개월 휴직을 한 적이 있었다. 단 6개월만 현장을 떠나 있었을 뿐이었는데도 복직하기 전 떨렸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 전업주부로 살다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된 민정이 엄마의 긴장감은 안 봐도 비디오다. 아무리 태연한 척도 감정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다. 엄마를 걱정하는 민정이의 응원 덕분에 민정이 엄마 출근 첫날이 왠지 기분 좋은 시작셨기를 바란다.


나는 방학 계획표 쓰는 게 어렵다. 어느 정도 어렵냐면 이 정도, 강아지 똥 치우는 것보다 어렵다.   


<방학생활계획표 쓰기>라는 제목의 태수(가명) 글이다. 2학년에게는 '계획'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맘껏 뛰어놀 시간도 부족한 21세기 아이들에게 방학이라는, 모처럼 찾아온 여유 시간조차 빽빽한 계획표를 세워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면 참 인생 재미없다. 재미없는 걸 하라고 가르치면서 그래야 성공한다고 말한다. 왜 성공하려는 거냐고 묻는다면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답할 텐데, 그냥 지금 행복하면 되지 않을까.


태수에게는 강아지 똥 치우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구나. 처음 강아지를 들여놓을 땐 그저 귀엽고 예뻐만 해주면 될 줄 알았지? 인생이 그렇게 자기 좋은 것만 하게 흘러가진 않는단다. 태수는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거, 방학 계획표 세우면서 느꼈을 거다.


아이들이 방학 동안 쓴 글이 많아 이틀에 걸쳐 집까지 싸들고 와서 읽었다. 아이들의 한 달간의 삶의 이야기와 그 속에 담긴 아이들의 생각과 느낌을 들여다보니 알겠다. 한 달만에 만난 너희들이 왜 그렇게 여러 모로 달 보였는지, 왜 훌쩍 큰 것 같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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