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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민 Oct 30. 2022

1.


- 읽으며 들으면 좋은 플레이리스트 : 모든 이의 삶이 한 편의 영화같더라. (https://youtu.be/NpfXGCIYgl8)




“내리는 비에는 어떤 마음이 담겨 있을까.”

한참 동안의 적막을 뚫고 갑작스레 울려 퍼진 이서의 목소리에 나는 순간적으로 놀라며 눈을 떴었다.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핸드폰이 이불 위로 떨어졌다. 나는 황급히 핸드폰을 들어 귓가에 가져다 대며 그다음에 올 말을 숨죽여 기다렸다. 이서의 말은 수화기 너머 적막을 채우던 빗소리에 파묻혀 빠르게 사라지고, 다시금 빗소리만이 고요를 덮어 내리고 있었다.

어느새 잠이 들어버린 걸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서가 수화기 너머 들려주는 빗소리를 함께 듣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이서가 빨리 다음 말을 해주길 바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다 싶어 무슨 일 있는지 물어보려고 숨을 들이마신 순간,  이서가 다시 말했다.

“자는 거 맞지..?”

아니라고 말하려다 그랬다간 이서가 아까처럼 다시 말을 거둘까 하여 숨을 참았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어떤 마음으로 세상에 비를 내릴까.”

“이서야, 강이서.” 참지 못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서의 목소리가 맞는 건가 싶었다. 내리는 빗속 가운데 한참 동안이나 비를 맞고 서 있던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도,  화를 낼 때조차도 항상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던 이서였는데, 그런 이서에게서 이제껏 전혀 듣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어디에 있다가 전화한 걸까. 밤을 새운 걸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이제 막 일어났을 경우를 감안해보려 해도, 이서의 말들은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기만 할 뿐, 여전히 또렷하다 못해 한참을 벼린 칼 끝처럼 서늘하게 느껴졌다. 오랜 시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이의 시간이 가득 배어있는 듯했다.


내가 말한 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던 걸까. 이서는 다시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귀에 가져다 대고 있던 핸드폰을 들어 얼굴 앞으로 가져오며 일어나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리고는 휴대폰의 시간을 확인했다.

00시 45분, 밤. 한국과 레바논의 시차는 7시간. 한국은 지금쯤이면 아침 7시 45분 정도를 지나가고 있을 터였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지난 걸까…


나는 잠시간 멍해진 상태로 암흑에 둘러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을 응시했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점차 사방에 희미한 윤곽이 잡히며 방 안에 놓인 사물들을 비롯해 다시 주위가 인식되기 시작했었다. 정신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예사롭지 않던 말뜻들을 헤아리기 위해 나는 방금 있었던 일을 다시 빠르게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 여보세요? 세하 언니, 자? 나야.

이서에게 먼저 전화가 왔었다.

— 응, 이서야.

— 잤어?

— 응, 근데 괜찮아.

— 일찍 잠들었었구나… 미안.. 오늘 훈련 있었어?

— 응, 평소 자주 하는 거, 타 군부대 협력 훈련이 있었어.

— 힘들었겠다… 자는데 깨워서 미안해.

— 아냐, 좋아. 내가 너무 일찍 자고 있었던 거야. 잠깐만 눈 붙이고 있는다는 게… 일어나서 해야 할 일도 있었고 이서 너 덕분에 늦지 않게 일어났어. 고마워. 그리고 나도 네 목소리 듣고 싶었어.


그리곤 잠시 동안 수화기 너머 빗소리만이 들려왔다. 평소와 달리 새벽에 갑작스레 걸려온 이서의 전화가 의아하다 싶으면서도 오랜만에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통화할 수 있어서 좋았다.

우리 군부대의 경우 해외 파견지에 속해 있어서 인사이동이 잦았고, 그만큼  뒤죽박죽인 훈련 일정으로 인해 전화하기 좋은 시각을 예측하기가 어려운 터라, 비교적 훈련 시각이 일정한 이서에게 내가 먼저 통화를 거는 식이었다. 그러나 요즘 한참 훈련이 몰아치는 시기에 설상가상으로 야전 훈련이 연속적으로 잡혀 있었어서, 훈련을 마치고 나와 이서에게 전화할 수 있는 시각이 되면 대부분 이서가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내가 먼저 통화를 하지 못하는 시기가 길어지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이서가 통화를 거는 편인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문자로만 연락하고 통화를 하지 못한 지, 거의 이주일이 넘었다. 최근 들어 아예 통화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심장이 조금씩 죄어오는 것 같았다.  


기다려도 아무런 말이 들려오지 않자,

—이서야

무슨 일 있는지 물으려는 차에

—비온다, 여긴.

이서가 말했다.

수화기 너머 드르륵하며 창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빗소리가 아까보다 더 선명하고 크게 들려왔다.

— 들려?

— 응, 들려. 좋다.

— 그치. 거긴?

— 여긴 당분간 비 소식은 없다 하더라구.

— 그렇구나.

— 응.

그리고 우리 사이에는 다시금 빗소리와 함께 적막이 내렸다. 머리가 복잡했다. 무슨 일 있는지 물어도 되는 것인지 아닌지. 몸을 움직여 머리맡에 전등을 켰다. 갑작스레 밝아진 주위에 잠시 눈을 찌푸렸지만, 핸드폰을 고쳐 잡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뭔가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숨죽여 호흡을 들이켜고는 전화기를 좀 더 귀에 바짝 붙였다. 빗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 이서야

들려오는 빗소리에 감춰졌을지 모를 이서의 호흡을 찾고자 했다. 비는 눈치 없이 세차게만 내렸다. 수화기 너머 내리는 비 가운데 이서가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네가 숨죽여 울고 있는 것만 같아서 겁이 났다. 왜 갑자기 이런 걱정이 드는 걸까.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 이서야, 강이서.

— 응.

이서는 들이켰다 한동안 참았던 숨을 내쉬어내듯 답했다.

— 이서야, 혹시 너…  

— 언니.

— 응?

— 나 괜찮아.

— ……

— 그냥 빗소리가 좋아서, 언니랑 함께 듣고 싶어서 그래서 연락했어. 언니 빗소리 좋아하는데, 거긴 비가 잘 안 오잖아.

— 하지만…

— 정말이야.

—…정말?

— 응, 정말.  

— 그래도…

— 아니야, 무슨 일 없어.

— 그래… 아니, 그래도,

— 쉿. 빗소리 듣자. 듣다가 자도 괜찮아.

— ……그래


걱정이 잦아든 건 아니었지만 이서가 단호하게 나올 때의 고집을 알고 있었다. 이 이상으로 물어보려 한다면, 아예 말하려 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나는 다시 벽에 등을 기대고는, 귀에 전화기를 가져다 둔 채 이따금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가만히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빗소리를 들었다. 긴장을 했던 걸까, 오늘 훈련 때문이었는지 어깨 죽지가 결리며 눈이 살짝 감길 듯했지만, 오랜만의 연락이고 이서와 오래 같이 있고 싶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 언니

긴 적막 사이로 이서가 말했다.

— 응

나는 이서의 그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이서의 목소리는 다시 빗소리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이서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나는 그저 묵묵히 빗소리를 들었다. 3분. 딱 3분만 기다리고 그래도 말이 없으면 물어보자고 했다. 핸드폰을 계속해서 껐다 켜 보지만, 1분조차 흐르지 않고 있었다. 1분이 10분 같았다.

 무슨 일이 있는지 당장이라도 묻고 싶었지만 그럴 기미가 보이면 자꾸만 말을 돌리려는 이서의 행동으로 보아 섣불리 물어선 안 될 것 같았다. 입을 열면 금방이라도 물어보게 될 것 같아서 되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비가 모여 바다가 태어났대.

한참동안의 적막을 깨고, 이서가 말했다. 이서의 목서리는 아까 보다는 조금 밝아져 있었다. 하지만 애써 밝게 말하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 응?

나는 신이 비를 내리는 마음에 관한 앞 문장과 방금 이서가 말한 바의 연결이 어떻게 되는지 살피기 위해 분주해졌다.

— 언니 한국 돌아오면, 우리 바다 보러

— 휘익

갑작스레 수화기 너머 날카로운 호각(*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뜻을 알 수 없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 아, 나 들어가 봐야 한다 끊을게.

— 어? 잠깐..

— 사랑해, 세하. 정말 많이.

이서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황급히 말을 마치고는 내가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곧장 통화가 끊어졌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이서와 했던 마지막 통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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