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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 Oct 26. 2023

 ‘미지’ 의 세계

그 애의 태몽은 사슴이었다. 그것도 눈이 정말 큰 꽃사슴. 나는 그날 집에 있던 커다란 동시집을 읽었는데, 사실 몇 번도 더 읽은 내용이라 꿈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었다. 꿈속의 나는 넓디넓은 꽃밭에 서 있었고 책에서 본 눈 큰 사슴이 날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 그 사슴을 타고 한참을 꽃밭에서 뛰놀았다. 잠에서 깼을 땐 어렸지만 꿈이 참 예쁘고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아침이 되자마자 엄마에게 조르르 달려가 꿈 내용을 말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서 엄마는 지금도 그 꿈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때 동생 태몽을 네가 꾼 거라고.


동생을 가진 엄마는 내가 본 엄마의 인생 중 가장 고통스러워 보였다. 틈만 나면 픽 쓰러지거나 같이 밥을 먹다가도 흰 죽을 밥알 그대로 토해냈다. 난 그래서 아직도 토를 하는 것도, 보는 것도 무서워한다. 이렇게까지 엄마를 힘들게 하려고 동생을 낳아달라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결국 동생은 나와는 다른 방법으로 세상에 나왔고 심지어 부서질 듯 약했다. 나는 동생이 진짜 태어난 건지 궁금해서 아빠에게 언제 볼 수 있냐고 여쭤봤고, 동생이 인큐베이터에 누워있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도 엄마 전용 인큐베이터 같은 곳에서 쉬고 있는 것 같았다. 그토록 기다렸는데 엄마와 동생을 한꺼번에 못 보다니, 동화에서 봤던 것처럼 마냥 평화롭지는 않아서 속상했다.


모든 사람이 동생이 얼마 안 가서 죽을 거라고 수군댔다고 한다. 그런데 걔는 용케 살아남았고,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방에 동생이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숨을 죽이고 발뒤꿈치를 든 채 어두운 방으로 향했다. 사실 하얀 포대기와 손 밖에 보지 못한 채 떠밀리듯 나왔지만, 동생을 처음 마주하고 마음이 동동 뛰었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그렇게 엉겨 붙은 머리로 잠만 자던 동생은 커갈수록 꿈에서 봤던 사슴을 점점 닮아갔다. 큰 눈에 쌍꺼풀도 짙게 있어서, ‘어른들이 말하는 태몽의 힘이 이런 거구나’ 하면서도 나도 엄마 딸인데 쌍꺼풀이 동생한테만 간 건 조금 억울했다.


동생의 이름은 미지다. 처음엔 내 이름을 따라 ‘수’나 ‘현’이 이름에 들어가는 걸 기대했지만, ‘미지’라는 더 멋진 이름이 완성되었다. 아름다울 ‘미’에 알 ‘지’. 사람은 이름 따라간다고, 미지는 이름처럼 자랐다. 그리고 틈만 나면 나를 따라 했다. 내가 책을 읽고 있으면 한글도 아직 못 뗐으면서 책을 거꾸로 들고서는 옆에 앉아있거나, 내가 걸레질하면 미지는 면봉에 물을 묻힌 후 야무지게 소파 틈새를 청소했다. 하루는 ‘미지는 꿈이 뭐야?’라고 물어보면 ‘대통령’이라고 답했고, ‘대통령 되면 뭐 할 거야?’라는 질문에 ‘화장실 청소’라고 답해서 어른들이 웃느라 뒤집어졌던 적도 있다. 청소하는 대통령이라니, 그 애답게 솔직하고 참신한 답변이었다.


미지는 나와 함께 노는 걸 좋아했다. 아니, 사실은 내가 더 좋아했다. 혼자 지냈던 시간이 길어서 놀이에 결핍이 있던 나는, 직접 창작한 놀이를 미지에게 규칙을 알려준 후 최선을 다해서 몰입했다. 소파 위를 기어가며 정글 놀이를 하거나, 인디언 놀이를 할 때는 이불이 마치 텐트인 듯 내 다리로 접고 펴는 시늉을 했고, 가상의 설정에서 내가 죽을 때는 미지는 정말 엉엉 울었다. 마음이 약해진 내가 규칙을 어기고 살릴 방법을 알려주면, 미지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로 다시 웃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미지가 방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미지는 문밖에서 언제 언니랑 놀 수 있냐고 물었고, 나는 숙제든 공부든 다 하고 놀아준다고 했다. 어린 미지는 알겠다고 했지만, 그새를 못 참고 방문을 고양이처럼 긁거나, 문에다 대고 놀자고 속닥거렸다. 결국 나는 미지와의 약속을 다 지키지 못하고 집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스무 살 어느 날, 명절을 맞이해서 고향에 들른 나는 미지가 내가 입었던 교복을 똑같이 입고 집으로 돌아오는 광경을 마주했다. 문지방을 밟고 조그맣게 서 있던 네 살 아니면 여덟 살 이었던 걔가 왜 교복을 입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그제야 동생의 시간 일부에 내가 없었다는 점을 비로소 깨달았다. 마치 손님이 지인의 집에서 앨범을 뒤적거리며 그 사람의 삶과 성격을 추측하는 것처럼, 너무 커버린 동생의 모습과 그간의 공백을 그렇게 메꿔야 했었다.


공부하는 동생의 뒷모습을 모로 누워서 바라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작은 체구로 어떻게 이 험난한 세상을 잘 버텨오고 있는지 대견하고 고마웠다. 그러다 한때 언니가 전부였던 저 아이의 삶에 이제는 내가 감히 들어설 자리조차 없을까 봐 울적해지곤 했다. 그런데 얼마 전, 미지가 어린 시절 나와 함께했던 놀이 덕분에 지금의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덤덤하지만 따스함이 가득 배어있었다. 방문 앞에서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언니가 모든 것을 다 잘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해서 동생에게 나는 무의미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 짧은 한마디로 알 수 있었다. ‘미지’의 세계는 그 애의 몸집과 반비례하게 깊고 넓었다. 그 아이의 세계에서 우리는 여전히 처음 만났던 꿈의 한 장면처럼, 마냥 풀밭을 뛰어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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