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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 Oct 08. 2023

두선 할머니께.

두선 할머니께.


할머니, 몇 달 전에 제 꿈에 나왔어요.

처음 보는 운전기사가 몰고 있는 버스에 저랑 할머니랑 꼭 붙어서 앉아 있었지요. 저는 그때 제 나이의 어른 몸이 아니라, 일곱 살쯤 되는 어린아이의 형태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아차렸어요. 꿈속의 주인공은 나지만 우리 둘을 지켜보는 것도 나였으니까요. 사방은 컴컴했고, 어디를 향해 달리는 지도 알 수가 없었어요. 그 긴 시간 동안 분명 할머니와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것 같긴 한데, 기억은 나지 않아요.


잘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엄청나게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더니 공터에 도착해서 우리는 그곳에서 내렸어요. 그 주변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서 수다를 떨거나 술 한잔을 하고 있더라고요. 날만 밝았으면 흡사 등산객 모임 같았어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다들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드는 광경이 이상하고 어색해서 기웃거리며 구경하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 새 사라졌어요. 할머니- 할머니이- 애타게 부르면서 찾는데 할머니는 어떤 모임의 한가운데서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더라고요. 할머니를 둘러싼 모두가 흥미롭게 듣고 있었어요. 그 장면을 보자마자 할머니를 찾았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우리 할머니가 타고난 이야기꾼이라서 여기에서도 인기가 많구나!라는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거 있죠.


그런데 그것도 잠시, 갑자기 장면이 전환되면서 할머니는 또 사라졌어요. 그러더니 아까 타고 온 버스의 운전석에 이번엔 할머니가 타고 있었어요. 뒷좌석은 미어터질 듯이 많은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그 버스를 힘겹게 모는 할머니의 표정은 정말 비장해 보이고, 견고해 보였어요. 할머니가 살아생전에 내게 보여준 적 없는 표정이에요. 그래서 낯설어 보였어요. 그러더니 그 많은 사람을 태운 버스를 몰고선 어디론가 가버렸어요. 그리고 저는 눈을 떴어요. 할머니가 떠난 후 이제 겨우 두 번째로 내 꿈에 나타난 건데, 조금 허무했어요. 기대만큼 따듯한 느낌이 아니었어요. 뭐랄까, 꿈속의 할머니는 나에게 말도 거의 하지 않고 꿈 내용도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이상했거든요. 내 인생의 절반을 함께 한 할머니인데, 왜 이렇게 꿈속의 할머니를 읽을 수가 없을까요. 참 서운하지만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어요.


엄마는 내가 할머니 꿈을 꿨다고 하면 항상 안부를 물어보셔요. 할머니 잘 있느냐고, 얼굴은 어때 보였냐고, 괜찮아 보였냐고. 사실 처음엔 거짓말을 해야 하나 싶었어요. 솔직히, 할머니는 속상해 보이진 않았지만 그렇게 밝아 보이지도 않았고 주위 배경이 어두웠으니까요. 그래서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엄마는 잠시 심란해지곤 했어요. ‘우리 엄마가 마음이 안 편한가?’ 등등의 혼잣말을 하고선 말이에요. 어떻게 보면 꿈속의 할머니는 사실 나의 내면에서 정의하는 모양일 수도 있는데, 엄마는 내 꿈에 나온 할머니마저도 걱정해요.


할머니, 사실은요, 할머니가 많이 편찮아지신 후 우리 가족 모두가 할머니 간병에 매달렸을 때 어린 마음에 엄마도, 할머니도 그만 아프고 할머니가 주무시다가 좋은 모습으로 돌아가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있어요. 참 못됐죠? 할머니가 의식을 잃기 전까지는 이렇게 존댓말도 쓰지 않는 어린애였는데, 막상 편지를 쓰려고 하니 그때처럼 반말이 나오지 않아요. 그래서 할머니가 기억하는 마지막 내 모습이 궁금해요. 할머니가 마지막까지 유일하게 알아보시던 엄마마저 구분하기 어려워하는 순간에는 나는 직감했어요. 어쩌면 지금 할머니 머릿속의 바스러지고 있는 기억 조각에는 나와 미지는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구요.


할머니, 있잖아요, 사실은 고등학생 때는 공부 핑계로, 대학생 때는 거리 핑계로 할머니를 보러 요양병원에 잘 들르지 않았어요. 아픈 엄마, 아빠를 대신해서 그렇게 소중한 제 어린 시절을 투박한 손으로 잘 보살펴 준 분인데, 병원 문을 열고 마주한 할머니가 눈에 초점도 없이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모습을 보기만 하면 저는 따듯하게 손을 잡아주기는커녕 침대 머리끝에서 울기 시작해서 복도에 나가서까지 계속 울었어요. 나중엔 엄마, 아빠가 쓸데없이 병원에서 너무 운다며 혼내시기도 했어요. 할머니 나는요, 그맘때쯤이면 제가 다 컸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이제 머리 좀 자랐고 어른스러워진 줄 알았는데 그러긴커녕, 그저 건강했던 할머니가 점점 야위어 가는 그런 모습이 무섭고 인정하기 싫었던 것 같아요. 평소엔 아무렇지 않게 웃던 내가 진이 빠진 채 울기도 싫었고, 할머니로 인해 가족들이 전부 침체하는 날이면 그것조차 싫었어요. 그래서 그냥 피했어요. 나 너무 못됐죠 할머니.


그래서 그렇게 내 꿈에 자주 안 나오나 싶어요. 할머니가 가장 아플 때 내가 가졌던 그런 마음을 알아채고 나한테 삐진 건지, 애지중지 키운 손녀에게 허탈한 실망을 한 건지, 아니면 상대방을 지나치게 배려했던 할머니 성격에 또 괜한 걱정 주기 싫어서 몇 년에 한 번씩만 나타나는 건지. 나는 요즘 돼서요, 문득문득 할머니 생각이 나요. 할머니가 떠난 날조차도 실감이 나지 않아서 머리에 흰 핀만 달고 있다가 멍하니 앉아있다가 왔는데, 이제야 실감이 조금씩 나요. 엄마가 자신도 엄마가 보고 싶다며 아이처럼 엉엉 울 때나, 이제 다 큰 미지와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할 때나, 그리고 치열한 서울 살이를 한 날,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가 문득이요.


나는요, 어렸을 때 가족 중에 누가 제일 좋냐고 물어보면 망설임 없이 엄마도, 아빠도 아닌 할머니였어요. 할머니에게 화투도 처음 배웠고, 팔송 범어사역 근처에서 번데기도 처음 먹어봤고, 할머니 손 잡고 이곳저곳 많이 다니고, 재밌는 옛날 노래도 많이 배웠어요. 한 번은 승부욕이 지나쳤던 내가 화투에 져서 화투장을 할아버지 앞에서 던졌더니, 성질부린다면서 할아버지께서 불같이 화내는 걸 할머니는 옆에서 화투를 한 장씩 주우면서 나를 달래줬잖아요, 그쵸? 가끔은 그림 그려달라고 하면 귀찮을 텐데도 스케치북에 스윽스윽 그리고, 심지어 잘 그려서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잖아요. 엄마 아빠가 집에 없는 날이면 심심해진 미지랑 내가 자는 할머니 깨워서 숨바꼭질 같이 하자고 했는데, 할머니는 맨날 다 보이는 커튼 뒤에 숨어서 제일 먼저 들켰잖아요. 이것도 기억나요?


가끔 엄마가 화를 못 이겨서 매를 들려고 하시면 나는 매번 할머니, 할아버지 방으로 달려가서 등 뒤로 숨었어요. 그럴 때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오히려 엄마를 혼내고 나를 감싸줬잖아요. 또, 내가 돼지 김치찌개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돼지고기를 기름이 떠다닐 정도로 넣어서 엄마한테 혼나기도 했잖아요. 어쩌면 이런 이유로 할머니가 가장 좋다고 했나 봐요. 마음이 너무 아파요. 할머니. 나는 그렇게 할머니를 제일 좋아한다고 했는데, 정작 혼날 때만, 배고플 때만 할머니를 찾고 할머니가 좋아하는 꽃이나 요리 한번 아프시기 전에 해드린 적이 없어요. 그 쉬운 색종이 편지마저도요. 할머니, 있잖아요, 그때는요, 할머니 존재가 너무 당연한 줄 알았어요. 그렇게 얼굴도 심성도 곱고 손맛도 좋았던 할머니가 당연히 영원할 줄 알았어요. 이렇게 늦어버린 편지가 거기까지 닿을 수 있을까 싶지만 글로 써 내려가기 전까지 이 말들은 계속 내 마음속에서 맴돌았어요.


할머니, 할머니-. 저는 어릴 적에 괜히 할머니를 부른 적이 많아요. 내 입에서 맴도는 할머니라는 글자부터 할머니의 반 박자 늦지만 미묘하게 리듬감이 있었던 대답, 그리고 눈을 붙이고 있다가 내 부름에 눈이 힘겹게 떠질 때의 눈주름과 할머니의 모든 것이 좋아서 이유 없이 많이 불렀어요. 그래서 이번 편지에서도 할머니를 많이 불렀어요.


할머니, 우리 두선 할머니. 대답은 안 해도 되어요. 부디 그곳에선 무릎도, 골반도 아프지 말고, 건강하셔요. 우리 가족 모두, 그리고 큰손녀가 할머니를 많이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해요. 옆에 할아버지가 있다면, 할부지께도 내가 사랑한다고 말했다고 전해줘요. 다음 내 꿈에 나올 땐 힘들게 버스도 몰지 말고, 그저 고운 아가씨처럼 꼬까옷 입고 환하게 웃으면서 만나요.



큰손녀,

수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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