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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 Nov 10. 2024

『아빠』 를 인터뷰하다.

#11 가족으로부터 (feat. 69년생이 96년생들에게)

10월의 어느 금요일,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그동안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두통도 슬며시 사라지고 마음이 들뜨기 시작합니다. 그날은 출장으로 한국에 몇 달 만에 돌아온 아버지를 뵙는 날이었어요.


울산에서 주말을 보내던 중, 아버지께 처음 인터뷰 이야기를 꺼냈을 땐 영 어색하고, 크게 해 줄 말이 없다며 손사래를 치셨습니다. 하지만 식사하는 동안에도, 카페로 향하는 동안에도 제가 보내드린 사전 질문지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저도 긴장하는 아버지 모습은 거의 처음 봐서 그런지 낯설면서도 애틋한 감정을 느꼈달까요. 그리고 걱정과는 달리, 아버지는 담백하지만 차갑지 않은 온도로 성실히 답해주셨습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아빠’에 대한 이야기는 연말 감성과 정말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찬바람으로 몸이 으스스 떨릴 때쯤 저녁에 작은 불을 켜두고 이번 글을 쓰면 더 잘 써질 것 같았거든요. 마침내 11월이 된 지금, 저는 정말 마음먹은 대로 ‘크리스마스 플레이리스트’를 잔뜩 들으며 행복하게 작업했습니다. 듣기만 해도 포근해지는 캐롤처럼, 우리 아빠의 인터뷰 내용에는 그런 추억과 따듯함이 묻어있었어요.




# 아빠에게도

‘스물아홉’이 있었어.


올해로 56세의 아버지. 96년생인 저는 아주 어릴 적 ‘690000-’으로 시작하는 아버지의 주민등록번호를 보며 신기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숫자 모양만 보면 분명 내가 태어난 연도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1969년도에 태어났다는 어른들의 설명을 들을 때면 까마득하게 느껴졌죠. 시간 감각이 깊지 않았던 당시에는 상상이 잘 안 갔습니다. 저를 제외하면 부모님, 할머니, 할아버지, 유치원 선생님, 주위 어른 모두 한 번에 같은 시대에 태어난, 그리고 원래부터 그 나이 그 모습인 줄 알았어요. 지금에서야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아빠의 20대 후반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지금 회사에 스물일곱에 입사했는데, 입사 후 1년 반 만에, 그러니까 스물여덟에 엄마랑 결혼했어. 그리고 그해 12월에 수현이 네가 첫딸로 태어났지.”


세상에, 정말 일사천리 아닌가요! 저는 이 모든 것을 해낸 아버지가 대단해 보였습니다. 잠깐 잊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저희 아버지는 스물아홉에 신입 사원, 한 아이의 아버지, 한 가족의 가장 역할을 모두 해내고 있었어요. 지금 제 상황에 대입해 보면 눈앞이 캄캄할 정도죠. 그렇지만 막상 아버지는 덤덤했다고 해요. 그때는 주위 동료들이나 친구들도 비슷한 시기에 취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이 모든 것이 당연한 절차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부터 아이까지, 속도가 너무 빠르기도 했다 보니 젊었을 땐 가끔 혼자 사는 친구들이 부러울 때도 있었어.(웃음) 젊었을 때만 그랬지. 그런데 세월이 흘러서 보니, 빨리 결혼해서 너희를 일찍 낳은 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딸들 모두 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자리를 잡으니 다들 이제 나를 부러워하지!”


대화를 하다 보니, 아버지에게 개인적으로 궁금한 점이 생겼습니다. 서른의 문턱을 한참 전에 지나온 어른으로서, 스물아홉은 어떤 느낌으로 기억되고 있을지요.


“사실 나 같은 경우는, 이미 그즈음엔 온전한 가정을 유지하는데 모든 것을 쏟아붓느라 다른 고민을 할 틈이 없었어. 커리어도 쌓으면서 남편, 아버지로서 최선을 다해야 했지. 다만 요즘처럼 내 몸 하나 건사하기 어렵고, 취업과 결혼 등 모든 것에 대한 준비 기간이 길어지면서 초조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 것 같아. 그렇지만 이건 사회의 문제지, 개인의 문제로 탓을 돌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


그리고 아버지는 스물아홉 자체가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살던 시대의 스물아홉은 그 나이에 직장, 결혼, 아이 등 이미 많은 것을 일궈놓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지만, 이제 세상이 바뀌어서 절대 당연하지 않게 되었어. 그래서 각자 사회에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은 다를지 몰라도, 지금의 스물아홉은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고,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해도 괜찮은 나이야.”




# 쓰디쓴

‘쇠맛’ 직장생활.


최근 한 여자 아이돌의 컨셉으로 ‘쇠맛’이라는 키워드가 떠올랐죠. 저는 아버지의 직장생활을 들으면서 바로 그 단어가 생각났습니다. 동화 같은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고, 무채색에 가깝더라도 탄탄한 기본기와 단단함으로 승부하죠. 사실 ‘무난하고 평범’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요즘 들어 느끼곤 합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한 직장에서 같은 직무로 30년째 근속 중이십니다. 가족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도 그 긴 시간 동안 정말 다사다난했을 텐데요, 지금 돌이켜보면 어떤 날들이 가장 떠오를까요. 아버지는 담담하게 소회를 털어놓으셨습니다.


“입사할 때만 해도, 나는 이곳에서 정년퇴직까지 다니리라 마음먹었어. 그땐 한 회사에서 정년까지 다니는 분위기가 당연시되기도 했었고. 그래서 30년 그 이상의 기간도 더 다니겠구나 했지.

다만 조선 해양 산업의 경기가 좋지 않았을 때, 회사에서 구조조정으로 고비가 찾아온 적이 있었어. 그때 많은 동료들이나 선배들이 갑자기 보이지 않을 때,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니 정말 불안했어. 나도 사람인지라, 회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는데 하루아침에 나가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 벌어지니 억울하고 혼란스러웠지. 더군다나 책임져야 할 가족도 있는 상황이라 더 힘들었던 것 같아.”


그때 우리 가족은 불안정해 보이는 아버지를 보며, 아무리 튼튼한 기업도 이렇게 한 순간에 흔들릴 수 있구나, 하는 걸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아버지가 심적으로 많이 힘들어 보이는 날들의 연속이었죠. 그때 아버지를 회사에서 버티게 해 준 힘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너무나도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대답이겠지만, 가족의 힘이 가장 컸어. 모두 함께 마음을 졸이면서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특히 네 엄만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지. 그리고 묵묵히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힘이 되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아버지는 스스로가 놓여있는 상황과 자신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대기업이라는 곳은, 한 명이 하나의 전반적인 직무를 담당하기보단 그 직무 안에서도 굉장히 쪼개고 쪼갠 단위의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아. 나도 그렇게 몇십 년간 일을 해오던 상황이었고. 이런 상태에서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려 다른 기업으로 가게 되면 지금까지 해보지 않았던 더 넓은 분야를 내가 담당해야 하지. 그런데 난 그럴 자신이 없었거든.”


어렴풋이 아버지가 어두운 거실에서 밤늦게까지 컴퓨터를 바라보고 있던 기억이 났습니다. 또는 술에 거나하게 취하셔서 방 문턱에 몸을 걸치신 채 쓰러져 잠든 모습도 봤죠. 저희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아빠가 아주 힘드신가 보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제가 직장인이 되어보니, 그때의 아버지 심정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갑니다. 이직과 직무에 대한 고민은 여느 직장인이 그렇듯 대다수가 겪는 일이지만, 한 직장에서 하나의 일만 해오던 40대의 가장이 급작스럽게 이런 상황에 놓였다면 그 자체로 큰 부담이었을 겁니다.


그때의 위기를 제외하면 제 기억 속 아버지는 정말 평탄하고 큰 굴곡 없는 직장생활을 해오셨습니다. 한 번쯤은 여러 요인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법도 한데, 마인드 컨트롤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는지 여쭤봤습니다.


“우선 직장에서 내 신조는 ‘그냥 내 일만 하자’인데, 이러다 보니 인간관계에서도 굳이 ‘적’을 만들 필요를 못 느꼈던 것 같아. 그래서인지 회식 자리나 다른 사람들이 모여있는 장소에서도 내 입으로 누군가를 험담한 적이 없어. 자연스럽게 상사나 동료들과도 부딪힌 적도 없고. 그런데 내가 워낙 내성적인 성향이라 그냥 조용해서 그런가 싶기도 하네. (웃음)”




# 지금 내 사람에게

만족하는 법.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서로에게 첫사랑이고 2년의 열애, 한 번의 이별, 그리고 마침내 결혼 후 지금까지 잘 지내고 계시죠. 가끔 호탕하게 ‘이젠 우린 의리로 산다’며, 장난스럽게 어깨동무를 하곤 해도 그 속엔 단단한 무언가 그 둘을 잡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에게 그 ‘단단한 무언가’가 어떤 것인지 물어봤습니다.


“아무리 사랑이 넘치는 사이라도 언젠가는 다툴 때가 있지. 그런데 나는 그 와중에도 믿음, 그러니까 서로에 대한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 나는 이걸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하면,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의 모습에 만족하는 마음인 것 같아.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전제하에, 싸우는 그 순간은 아무리 밉고 싫어도 ‘그래도 이보다 나를 많이 아껴주고, 더 나은 사람은 없을 거야’라는 굳은 믿음이 필요한 거지. 사실 다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어느 가정이든 똑같이 갈등이 있고 매일 평화롭진 않아. 그래서 단순히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상대방과의 신의를 저버리는 건, 바람직한 해소 방법이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과의 신뢰가 중요하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라도, 아버지를 통해 들으니 왠지 철학처럼 느껴졌습니다. 저희 아버지와 어머니는 정말 성향이 다릅니다. ‘공대생’과 ‘무용 전공’에서부터 그 차이가 느껴지듯, 아버지께서는 날카로운 문제 분석과 해결에 탁월하고 어머니께서는 예체능을 몸에 익히는 속도나 감각이 남다르신 편이죠. 그래서인지 간혹 의견 차이로 다투실 때도 각자 접근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버지는 서로의 다름을 어떻게 풀어나갔을까요?


“처음부터 이걸 맞추는 건 당연히 쉽지 않지.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계속 눈높이를 맞춰가며 꾸준히 소통하려고 노력했어. 그리고 엄마와의 갈등에서 가장 중요했던 건 잠시 ‘소강상태’를 가지는 거였어. 아무래도 감정이 격해있으면 계속 상대방의 의견을 관철하려 하고, 언성이 높아지면서 극단으로 치닫게 되니까 좋지 않지. 그래서 내가 잠깐 밖에 나가서 10분 정도 쿨타임을 가지고 돌아왔던 방법이 아무래도 서로의 부글부글함(웃음)을 가라앉히는 데 많은 도움이 됐던 것 같아”



간단해 보여도, 막상 내가 연애 당사자가 되면 잘되지 않을 때도 있죠. 그런 면에서 아버지의 노련미와 현명함이 돋보였습니다. 앞서 말했듯 두 분은 한 번의 이별 경험이 있었는데요, 또래 친구의 이별 담을 듣는 것과 다르게 아버지가 이야기해 주는 당시의 기억에는 뭐랄까, ‘응답하라’ 시리즈의 한 편을 보는 듯 풋풋함이 묻어있었습니다.


“아마 그때 *동성동본 문제를 포함해서 여러 문제로 엄마가 힘들어하던 도중에, 사소한 싸움이 있었고 그날 헤어짐을 통보받았어. 헤어진 당일, 나는 일 때문에 울산에 올라온 상태였고 엄마는 부산에 머무르고 있었지. 헤어진 그날 저녁, 정말 가슴이 답답하다는 걸 태어나서 처음 느꼈던 것 같아. 다시는 이 사람을 못 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고, 앞으로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먹먹해지더라고.


그때 누가 먼저 *전화를 걸었는지 모르겠지만, 서로 목소리 듣자마자 울었던 것 같아. 이야기하다 보니 엄마도 헤어지자고 말한 걸 후회하고 있었고, 나도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에 바로 미안하다고 말했지. 그러다 자연스럽게 ‘그럼 서로 앞으로 더 잘해보자’로 마무리되면서 헤어진 당일 재결합했단다. (웃음) 그날 뒤로는 아무리 지지고 볶고 싸워도, 이 사람 없이는 못 살겠다 싶어서 두 번 다신 헤어지지 않았어.”

*동성동본 금혼 분위기는 1997년이 되어서야 완화되었고, 2005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아직도 서로 전화를 먼저 하지 않았다고 우기는 중이다..




# 69년생이

96년생에게.


몇 년 전, 취업이 뜻대로 되지 않아 정말 속상했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안정적으로 직장을 다니고 있는 아버지가 부러워질 정도였죠. 제가 그런 이야기를 아버지께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때면, 자신은 시대 운이 좋았다며 만약 지금 태어났으면 분명 백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IMF 이후 청년들이 희망을 품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며, 연신 안타까워하셨어요.


이렇듯 아버지께서는 때때로 제가 고민과 힘듦을 토로할 때마다 당신의 다음 세대가 겪는 고충에 대해 늘 진심으로 공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제가 아버지를 가족이 아닌 사회에서 만났더라도, 배울 점이 많은 선배로 참 잘 따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아버지께서는 타인의 속도에 맞춰가느라 조급해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하셨죠.


“회사 간판,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물론 모든 기업마다 장단점은 있겠지만, 맹목적으로 대기업의 타이틀만 바라보고 입사했다가는 아주 세세한 단위의 업무에 배치되다 보니, 생각보다 직무 전문성은 쌓기 어려워서 시간이 지날수록 이직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이 봤어.

오히려 기업의 규모와 상관없이 견고하게 자신만의 전문성과 다양한 업무 역량을 쌓아온 사람이 어딜 가도 바로 적응하고 유능한 포지션으로 자리매김하는 사례를 더 많이 봐왔지. 그래서 무엇이든 네임밸류보단, 각자만이 살릴 수 있는 분야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전반적인 삶의 경로를 잘 설정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


아버지는 자신의 경험이 다채롭지 않고 그동안 직장밖에 다니지 않아,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회사 관련 소재밖에 없다며 머쓱해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직장 선배 중 제일 대선배이자 결혼까지 성공한 선배라 그런지, 1시간 내내 귀를 쫑긋 세우게 될 수밖에 없었네요. 마지막으로, 69년생이 96년생에게 해주고 싶은 말도 부탁드렸습니다.


“‘69’를 뒤집으면 ‘96’이 되듯, 고군분투하면서 살아가는 96년생에게도 언젠간 힘든 상황이 반전처럼 뒤집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 아빠로서, 또 어른으로서 지금 젊은이들이 기가 죽어있는 걸 보면 안타깝더라고.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다 해냈던 69년생들의 20대처럼, 패기와 기쁨을 다시 되찾으면 하는 마음이 늘 있지. 그런 인생의 봄날은 모두에게 꼭 찾아올 수 있으니까 희망을 가지고, 좌절하지 말고. 지금처럼만 잘 지내면 좋겠어.”



열한 번째 주인공은 제 멋진 인생 선배  「아버지」 였습니다. 스물 아홉들에게 울림​​이 되었길 바라며, 다음 인터뷰 주인공도 기대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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