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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봄 Apr 15. 2024

싹둑 잘라내고 싶은 순간이 있나요?


이수지 작가와 전미화 작가의 그림책은 대체로 글이 없다. 글 없는 그림책. 혹 있더라고 대체할 수 없을 때만 곁들인다. 곁들인다는 말이 딱인, 참 불친절한 그림책이다.



책 표지에는 나체의 여인이 앉아있다. 가슴이 봉긋, 고개만 180도로 누운 주인공의 모습이 기묘하다. 면지를 펼치자 나(주인공)의 하루가 이어진다. 여느 직장인처럼 지하철을 타고 집과 직장을 오가는 모습이 낯익다. 별스럽지 않은 하루, 온통 무채색인 배경 속에 주인공만 유채색이다. 맨홀에 빠져 깁스를 하고 혼밥을 먹으며 TV를 본다.  TV 속에선 웃음 소리가 새어 나오지만 나는 시종일관 무표정이다. 안대인지 수경인지 모를 무언가를 낀 나의 머리맡에 약통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아무래도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 같다. ‘재미없다. 지루하다. 재수없다.’  딱 이런 대사가 어울리는 장면이 이어진다.



글이 없어 답답한 반면, 글이 없어 상상하게 된다. 내 안에 질문이 쏟아진다. 


'마음이 고장난 걸까? 생기가 없네.

밑에 맨홀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가득한 생각은 무얼까? 

수면제를 먹어야만 잠들다니, 난 괴로운 기억에 사로잡히면 잠들지 못했는데 혹시?'


화분을 받는 장면


답답함이 밀려들 즈음, 선물과 편지가 도착한다.



날 용서해 줘~
(OO가)



'연인일까? 친구일까?' 편지와 선물을 보낸 그 사람이 궁금하다. 치켜뜬 눈썹과 불끈 쥔 주먹을 보니 나도 따라 표정이 굳어진다. '옳거니, 네 녀석이구나!' 그렇지 화분의 자리는 저기, 쓰레기들 틈! 버리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상하게 신경 쓰인다. 자꾸만 시들어가는게 나(주인공)와 닮았다. '저러다 시들어 죽어버리면 어쩌나.'  내멋대로 주인공의 마음을 대신해 대사를 덧붙인다. '에이, 죽으면 찝찝하니 볕이라도 쐬어줄까?' 햇빛, 물, 바람, 약간의 정성과 애정을 쏟자 조금씩 기운을 차리더니 급기야 꽃이 핀다. 줄기를 꺾어 옮겨심는데 또 꽃이 핀다. 하나둘 화분이 늘수록, 무표정이던 나의 얼굴에 생기가 돈다. 어느 덧 집 안은 초록 화분 천지다. 잠든 나의 머리맡에 식물 백과가 놓여있다. 이어지는 장면은 꿈 속을 그린 걸까? 이브의 낙원처럼 초록으로 가득한 정원에 전구 하나가 깜빡인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다음날 트럭을 끌고 화분을 옮긴다. 넘쳐나는 초록을 공터에 옮겨심으며 행복에 겨워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초록 화분에 둘러쌓여 잠든 나 | 그러던 어느 날, 전미화






그림책을 덮고 한참동안 멍했다. 영혼없이 껍데기만 걸치고 하루를 견디던 어느 날의 나를 만난 것만 같아서. 인생에서 그 한 토막만 잘라 지워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누운 얼굴이 '정말 그러길 바라는지' 묻는 것만 같았다. 상상의 여지가 많다는 건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는 반증. 책이 자꾸만 말을 걸었다.


'시들어가던 너는 이제 되살아났어?' 

'모르겠어. 어느 날 내가 쓰레기들 틈에 버려진 걸 알았어. 누가 버린 걸까 궁금했는데 알고보니 나였더라고. 내가 나를 내버려두었더니 시들어간거지. 처음으로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쐬고, 볕과 물을 주었어. 자주 말을 걸고 나를 살피기 시작했어.'


'드디어 너를 돌보기 시작한거야?'

'그게 돌봄이구나. 몰랐어. 그런 말이 있는지. 약한 존재만 돌보는 건 줄 알았어. 약한 걸 인정할 수가 없더라. 왠지 열심히 애쓴 나를 부정하는 것만 같아서. 인생에게 졌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어.'


'초록처럼 너를 살아숨쉬게 하는 건 뭐야?'

'읽고 쓰며 발견하는 중이야. 무엇을 기쁜지, 언제 살아있다고 느끼는지. 무엇에 감동하고 감탄하는지.'


글을 쓰며 생각했다. 인생에 어떤 순간도 무의미하지 않다고. 싹뚝 잘라 지우지 않길 잘했다고. 드라마〈또 오해영〉의 대사처럼 아무리 서툴고 못나도 나는 내가 애틋하다고. 


떨어진 벚꽃



작가소개


글.그림  전미화

가끔 먹고 사는 것이 힘에 부치면 잠시 멈추고 천천히 간다.

반드시 그것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위안으로 삼는다. ->「빗방울이 후두둑」에 실린 작가소개


쓰고 그린 그림책으로 「씩씩해요」「눈썹 올라간 철이」「빗방울이 후두둑」「미영이」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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