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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희 Oct 25. 2020

남편의 자아구조

술을 마시지 않는 남편 감사합니다만

남편은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참 고맙다. 술을 좀 마시면 얼굴이 벌게진다. 아마 술을 분해하는 신체적 능력이 좀 떨어지는 것 같다. 남편이 술을 마시지 않으니 나로서는 감사한 일이다. 술을 마시다 어느 골목에 쓰러지는 일이 없으며, 술값으로 돈을 탕진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술을 마시다 시비가 붙어 싸움으로 이어지는 일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이 술을 마시지 않아서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365일 정신이 멀쩡하여 망가지는 일이 없으니, 나에게 직장 상사처럼 지시하고 통제하려 든다. 남편이 술을 마시고 한 번씩 망가져 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렇다면 내가 남편에게 술을 마시지 말라고 잔소리도 해 볼 텐데 말이다.


에릭 번의 교류분석에서는 모든 사람 안에는 세 가지 인격이 함께 있다고 가정한다. 세 살 아이 같은 행동과 태도를 보이는 어린이자아, 자신의 부모처럼 행동하려는 부모자아, 합리적이며 객관적인 어른자아 등이 그것이다(해리스, 2020).


부모자아는 태어난 후 5년 동안 어떤 의문도 없이, 또 의지와 무관하게 인식해야만 했던 외부사건들의 기록이다. 부모자아라고 부르는 이유는 부모나 부모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내는 행동과 의견이 이 기록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내면 사건 즉, 아이 자신이 직접 보고 들으면서 느낀 반응도 기록된다. 어린이가 보고 듣고 이해한 데이터는 어린이자아라는 저장소에 담긴다. 10개월경에 아이는 자기 뜻과 생각대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런 자기실현이 시작되면서 어른자아 인격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어른자아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처리한다(해리스, 2020).


상대방과 교류하는데 있어, 우리는 부모자아, 어른자아, 어린이자아 간을 오간다. 그런데, 부모자아와 어린이자아는 자동으로 자극에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지나치게 편견에 사로잡히거나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다. 어른자아는 부모자아와 어린이자아의 자동반응을 막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어른자아의 힘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어른자아의 힘을 기르려면 먼저 부모자아와 어린이자아의 신호에 민감해야 하며, 어른자아가 교류의 주도권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어른자아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기본 가치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시간을 들여 충분히 검토한 후 미리 잠정적인 결정을 내려놓는 것이 필요하다(해리스, 2020).


누구에게나 부모자아, 어른자아, 어린이자아가 있다는 점에서 모든 사람은 인격의 구조적인 면에서 비슷하다. 그렇지만, 부모자아, 어린이자아, 어른자아에 담긴 내용이 개인마다 다르다. 그리고 부모자아, 어른자아, 어린이자아의 작동방식이 사람마다 다르다(해리스, 2020). 부모자아에 의해 오염된 어른자아가 어린이자아를 차단하는 경우 즐길 줄 모르는 일중독자가 된다. 어린이자아에 의해 오염된 어른자아가 부모자아를 차단하는 경우 양심없는 사람이 된다(해리스, 2020).


교류분석이라는 틀로 나와 남편 간의 상호작용을 들여다보게 되는 경우, 남편은 다양한 자아를 맘껏 휘두르는 것 같다. 아버지처럼 소리를 질렀다가, 티브이로 개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우스갯소리를 건네는 등 자기 맘대로다. 남편이 휘두르는 비판적 부모자아에 휘둘려서 나는 잔뜩 기분이 상해 있는데, 남편은 느닷없이 쾌활하게 우스갯소리를 건네면서 어린이자아를 발휘한다. 난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상황에서 남편의 자아 상태는 부모자아가 지배적으로 통제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신혼 때 남편에게 나이트에 놀러 가자고 했다가, ‘그런 곳에 가면 바람난다’는 잔소리를 듣고 끝낸 적이 있다.


그런데, 남편은 행복할까. 아내와의 관계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부모자아로 산다는 것이. 그리고 남편은 왜 그런 상태로 살아가게 되었을까. 아내인 내가 못 미더워서일까. 얼마나 삶이 재미없을까.

그리고 나는 어떤가. 난 한없이 행복하지만, 또 어떤 부분에서는 불행하기 짝이 없다. 남편이 내미는 비판적 부모자아에 질식할 것 같다. 남편이 비판적 부모자아로 행동하는 경우, 나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비판적 부모자아를 발휘해서 남편과 다투기보다는 나는 영락없이 쪼그라들어서 열 살 어린아이의 마음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남편이 하는 소소한 말들에 쉽게 마음이 상처받고는 했다.


친정아버지에 대해 나는 늘 미덥지 못하다는 느낌을 갖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와 우리 남매 셋이 놀러 가는 날에도, 아버지가 먼저 술에 취해 신발을 잃어버리고 비틀거려서 우리 삼 남매가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던 기억이 있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친정아버지는 나를 딸이라고 한 번도 차별 대우를 하신 적이 없는 멋진 아빠셨다. 그렇지만, 많은 상황에서 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어린이와 같은 면을 더 자주 봤던 것 같다. 그래서 어쩌면 내 자아는 어린 시절에 맘껏 어린이로 살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남편에게도 나와 같은 사연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어린이자아를 꽁꽁 숨겨 놓고, 부모자아로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자신은 가족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왜 가족이 자신의 생각만큼 행복해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억울해하면서 말이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 남편과 나의 상호작용은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것 같다. 남편은 부모자아의 특성인 편견이 강하게 작용하는 편이고, 아내인 나는 어린이자아의 특성 중 하나인 눈물을 보이는 경우가 잦다. 앞으로는 부부 모두 부모자아나 어린이자아의 신호를 살피고, 어른자아가 교류의 주도권을 잡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특히 나는 어린이자아가 반응하는 것을 피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린이자아의 신호를 민감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어린이자아가 보내는 신호를 민감하게 파악할 수 있으면 상대방의 어린이자아가 보내는 신호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무서운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대방의 부모자아가 무서워도 그 사람의 어린이자아는 사랑할 수 있다. 교류가 까다로울 때 상대방 안에 있는 어린아이를 보면서 생색내며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애정을 가지고 아끼며 어린이자아에게 말한다면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상대방의 어린이자아에 반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부모자아를 무서워하지 않는다(해리스, 2020, 151).     


남편의 부모자아에 잔뜩 겁을 먹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남편의 어린이자아를 바라봐주는 것이겠다.

또한, 남편과 나의 성격구조는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것 같다. 남편의 경우, 어른자아가 부모자아에 오염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나에게 비난을 퍼붓고는 한다. 나는 어른자아가 어린이자아에 오염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상대의 비난이 지나치면 문제 제기를 해야 하는데, 아이처럼 쉽게 눈물을 흘리고 만다. 어른자아가 부모자아나 어린이자아에 의해 오염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겠다.

또한 성격구조의 건강함은 독립적인 어른자아가 일관되게 모든 교류를 책임지는 것이다(해리스, 2020).      


교류를 할 때마다 어른자아가 부모자아와 어린이자아와 현실 세계에서 데이터를 수집한 뒤, 취할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다. 데이터를 더 많이 수집할수록 어른자아가 적절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해리스, 2020).    

  

남편도 나도 어른자아의 힘을 기르는 일이 절실해 보인다.


<참고자료>

해리스, 토마스 A. (2020). 성격의 비밀, 교류분석이 풀다-아임 오케이 유어 오케이(이영호·박미현 역. 원저 I’m OK-You’re OK by Thomas A. Harris, 1967, 1968, 1969). 이너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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