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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재 Dec 29. 2020

Ep.7 세시간을 달려

스물여섯이 되어서야


누런 흙길이든, 거무스름한 아스팔트 길이든 할 것 없이 따뜻한 햇볕이 비추던 4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정도로 더워진 날씨 탓에 나는 캐리어 속에 박혀있던 반팔 티 하나를 꺼내 입었다. 청두(成都)의 날씨는 근래 이상할 만큼 화창했다. 중국도 엄연히 사계절을 느낄 수 있는 나라이기에 당연히 봄을 만끽할 수 있지만, 생각보다 피부에 닿는 계절은 이미 여름이었다.


2018년 4월 18일 수요일, 공강이다.


월, 화, 목 이렇게 3일만 수업이 있던 나는 1주일의 4일이라는 어마어마한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청두 시내를 돌아다니거나 중국인 친구들과 여행을 떠났다. 중국어를 배우겠다는 의지가 무척이나 강했던 나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중국인들과 어울렸기에 공강이라고 기숙사 안에서 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이날도 어김없이 중국인 친구와 약속을 잡았다.


어느덧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내 주위엔 매일 같이 만나는 친구가 생겼다. 늘 나에게 먼저 다가와주고, 한국인을 많이 좋아해 주며, 우연히 좋아하는 취미가 같았던 친구가 있었는데 이날은 그와 함께 사진도 찍고, 등산을 떠나기로 했다. 날씨가 꽤 덥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내가 등산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기에 내심 께름칙했지만 외국인이던 나에게 자기 나라의 아름다움을 소개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얼마나 예쁘던가. 자기도 소중한 자신의 시간을 나 말고도 쓸 수 있었을 텐데 그 시간을 나에게 할애해주다니. 그 마음에 감동을 받아 나는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우리가 갈 곳은 어디인데?"

우리가 갈 곳이 어디냐는 질문의 친구는 칭청산(青城山)이라 답했다.


칭청산(青城山)은 도교(道教)의 발원지 중 하나로 이름 그대로 푸른 모습을 담고 있는 게 매력이라고 했다. 이것도 번역기를 돌려가며 겨우 알아들은 멘트였다. 아무튼, 내가 머물고 있던 '청두항공기술직업학교(成都航空技术学院)'에서 칭청산까지는 100km나 떨어져 있었다. 지도를 보니 이동시간만 3시간이었다. 말이 쉽지 100km를 달려 등산을 하러 간다니... 등산을 하기도 전에 가는 데 지칠 것 같았다. 근데 어쩌겠는가, 가기로 했으니 지하철에 앉아 종점까지 2시간을 달렸다.

그렇게 달려 도착한 곳은 시푸(犀浦) 역. 정확히 어떤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버스정류장과 택시들이 즐비해있는 걸 보니 환승역처럼 보였다.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살펴보니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많을 것을 보니 아마 우리와 목적지가 같은 사람들도 꽤 많이 보였다. 칭청산이라는 곳이 쓰촨성 내에서도 꽤 유명한 곳인가 보다.


난생처음 와 본 이곳에서 나는 절대 길을 잃어선 안됐다. 자칫 잘못해 한 눈이라도 팔면 바로 국제미아 될 게 불 보듯 뻔했기 때문에 나는 친구 녀석의 뒤통수만 보며 졸졸졸 따라갔다. 그러나 문제가 다른 곳에서 하나 생겼다. 관광객들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았는데 이 중 대부분은 패키지여행을 온 것이다. 날짜를 잘못 잡은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칭청산으로 향하는 버스 티켓을 패키지 여행사에서 대량으로 구입해버려 우리가 탑승할 티켓을 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곳은 중국이라는 걸 깜빡하고 잊은 것이다. 중국인 친구도 자신이 중국에 산다는 것 깜빡했다. 표를 구할 수 없다는 건 방법이 딱 하나라는 것이다. 비싼 요금을 내며 택시를 타고 갈 수 없으니, 중국의 민간 콜택시 '띠디(滴滴)'를 타고 가는 수밖에 없다는 걸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눈길을 반대편으로 돌려보니 띠디(滴滴) 기사들의 호객행위가 즐비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특히 호객 대상 1순위였다. 누가 봐도 외국인이었고, 어리바리해 보였으니까.

다행히도 중국인 친구가 있었기에 난 흔히 말하는 호갱(?)이 되지 않았다. 혹시 내 글을 읽고, 칭청산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미리 티켓팅을 하고 떠나길 바란다. 혹시 티켓을 구하지 못해 나처럼 띠디(滴滴)를 이용해야 한다면, 여러 사람과 동승하길 바란다. 그러면 요금을 N분의 1로 나눠 그나마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우리는 4명에서 한 차를 이용해 칭청산으로 떠났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앞자리에 앉고 있었다. 가뜩이나 중국어도 못하는데 말이다. 설상가상 운전기사님은 평소 한국인에게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도착하는 내내 내게 말을 거셨다. 한국인으로서 자존심이 상하면 안되니까 도착하는 내내 애써 알아듣는 척 웃음을 지었다. 겨우 알아들은 말에는 서투르게 의견 피력까지 했다. 그래도 한국인 망신은 시키지 않은 듯했다. 운전기사님은 시종일관 아빠미소를 지어주셨는데, 아마도 어린 청년이 먼 타국에 와서 공부하는 모습이 기특해 보이셨나 보다. (친구 녀석은 휴대폰만 하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날 도와주질 않았다.)

1시간 이상 달려 띠디(滴滴)의 속도가 줄어든 걸 보니 도착할 때가 된 듯했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르다 보니 하나 둘 고급주택처럼 보이는 건물들과 리조트, 호텔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눈에 봐도 수중에 있는 내 돈으로는 이용할 수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칭청산 자체가 관광지이자 휴양지이다 보니 그런 듯했다. 부자들만 이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고급 승용차들이 하나 둘 보였다. 부러워.

드디어 출발한 지 3시간 만에 칭청산(青城山)에 도착했다. 칭청산 입구에 도착했을 때 묘한 감정을 느꼈다. 분명 나는 등산을 하러 왔는데 왜 서울대학교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을까? 가슴이 웅장해진다. 지금도 이 사진만 보면 가방 속에 볼펜을 꺼내어, F=ma 공식을 활용하고 싶어 진다.


당연히, 근래에 지어진 건축물이겠지만, 누가 봐도 그 나라의 관광지임을 느낄 수 있게 입구부터 관광객들에게 인식을 심어주는 중국의 장점은 정말 인정해야 한다. 들어갈 때부터 설레는 감정이 뿜뿜하더니 입구를 지나 펼쳐진 광경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 세상 모든 산이 푸른 건 아니다. 하지만 이곳은 정말 푸르렀다. 그리고 핑크빛 봄도 군데군데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엔 벚꽃인 줄 알았는데 벚꽃은 아니었다. 제기처럼 보여서 나는 '분홍 제기 꽃'이라 불렀다. 입구를 지나면 칭청산으로 향하는 길이 쭉 펼쳐져있다. 가운데에는 넓은 차선과 양쪽 끝에는 초록 초록한 자연과 하늘로 쭉쭉 뻗어 나있는 나무들을 눈으로 즐길 수 있는 가로수가 나를 인도한다. 무엇보다 공기가 정말 맑다는 걸 몸소 느꼈다. 날씨까지 우리의 여정을 반겨주니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기분이 너무 상쾌했다.

이렇게 아이들이 소풍을 즐기는 순수한 기분을 만끽한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목에 걸고 온 카메라 속 SD카드 메모리가 쭉쭉 다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아름답고도, 고요한 곳을 보고 어떻게 지나칠 수 있을까? 살랑살랑 일렁이는 바람을 맞으며, 맑은 공기를 코로 크게 들이마시며, 눈을 질끈 감고 내가 느끼는 감정이 극대화되던 곳을 카메라 렌즈로 담았다. 이곳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았던 가로수길 중 가장 아름다웠던 곳이다.

나와 함께 동행해준 중국인 친구, 씨에린다오.

나처럼 사진 찍는 걸 좋아했고, 나처럼 여행하는 걸 좋아했으며, 나처럼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 보내는 걸 좋아했던 녀석이다. 지금은 비록 위챗(微信)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지만, 코로나 상황이 많이 호전되면, 반드시 다시 만나러 가고 싶다. 나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가장 아름답게 남겨준 친구였기에.

이제 일렁이는 감정을 다 잡고, 등산할 준비를 해야 할 듯싶다.


더 큰 자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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